대학교 2학년, 실리콘밸리 빅테크 인턴이 되다


난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정확히는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작년 1학년 때 만난 사람들, 있었던 추억들, 학교 수업 내용들도 가물가물하다.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의 얼굴은 물론 이름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 집에 있을 때, 종종 엄마와 아빠가 초등학교 얘기를 하곤 한다. 두 분은 동갑내기 동창인데, 몇십 년 전의 일들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참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다. 엄마를 좋다고 쫓아다니던 우스꽝스러운 남자아이의 이야기라든지 (사실인지 확인된 바 없다), 다리 아래 계곡에서 돌을 던지며 놀던 아빠의 한적한 시골 학교 생활이라든지.

그래도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남아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동네 로봇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흉내 내기 정도되는 블록 코딩이었지만 첫 경험으론 나쁘지 않았다.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컴퓨터에 노출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때 인터넷, 그리고 구글을 처음 접했다. 멋모르던 작은 남자아이의 꿈이 생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악마의 게임, 롤을 접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의 인기 장래희망은 세계 정복 혹은 대통령이었다. 허무맹랑하지만 거대한 꿈을 가질 수 있는 나이였고, 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구글과 같은 거대한 IT 기업의 CEO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남기겠다 다짐했다.



예정대로라면 난 지금 군대에서 상병을 달고 있어야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아직 미필이라는 거다. 다른 대학 동기 유학생들은 대부분 군대를 갔다. 치욕스럽지만 매일 같이 아직도 미필이 있냐며 단톡방에서 놀림받고 있다.

계획이 뒤바뀐 건 하루아침 만이었다. 1학년 2학기 말, 기말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미국 대학교의 2학기는 1월부터 5월까지다)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고 (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비밀이니까), 군입대를 1년 미뤘다. 이 결정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뒤바꿔놓았다.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달까. 군대를 미루는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된 근거가 있었다. 아까웠다. 내 실력이.

미국 대학생들, 특히 컴퓨터 과학 (CS) 전공자들은 긴 여름 방학 동안 인턴이나 리서치를 하는 것이 정석이다. 취업 시장이 많이 어려워진 만큼 인턴 경력의 질과 양이 중요한 셈이다. 졸업하고 밥은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물론 1학년 끝나고 인턴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는 유학생 입장에선 말이다.

코딩 실력이 우상향 중이었다. 실제 유저가 유입되는 실사용 커뮤니티 웹사이트 배포를 마쳤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2학년이 끝나고 미국에서 여름 인턴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22년 인생 중 가장 치열한 1년이 시작되었다.


다다익선 多多益善

한국 인턴 취업과 미국 인턴 취업은 비슷해 보이나 분명 결이 다르다. 미국 인턴은 물량공세다. 많아야 몇 십 개 지원하는 한국 개발자 취업과는 다르다. 링크드인에 올라오는 인턴 공고란 공고는 최대한 총알을 쏴봐야 한다. 지원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솔직히 100개도 적은 수준이다.

개발자 여름 인턴 공고는 굉장히 일찍부터 올라온다. 얼마나 이르냐면 25년 여름 인턴을 24년 9월부터 지원해야 한다. 말 그대로 대학 학기 내내 인턴 취업 준비를 병행해야 하는 셈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미국 취업 시장에서는 이력서나 프로젝트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상회할 만큼 네트워킹이 중요하다. “인맥 빨”이다. (진짜 크다, 한국의 학연, 지연보다도 더 심하다) 추천 제도인 Referral을 회사 재직자에게 받고 인턴 지원을 하면 Resume Screening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난 자존심이 상했다. 인맥 빨은 노잼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Referral을 받지 않고 인턴을 잡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물론, 딱 한 번 레퍼럴을 받아서 굉장한 퀀트 회사 라이브 코딩 인터뷰를 봤다. 떨어졌다 엉엉)

500군데 넘게 지원했다. 서류 합격은 총 3곳

1차 통과율 0.6%의 사나이


합격하기 어려운 구조

3군데 중 하나는 9월 달 말에 인터뷰를 봤다.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졌다. 유일하게 Referral을 받은 곳인데, 1차 라이브 코딩 인터뷰를 보고 떨어졌다. 그땐 무지성으로 코드를 쓰던 때라 Readability와 Scalability는 내다 버렸었다. 그게 패착이었다.

다음으로 인터뷰를 본 곳은 Samsara라는 Supply Chain와 Cloud Service를 연계한 중견 기업이다. 만족스러운 규모의 기업이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인터뷰를 봤다. 첫 번째 HR 라운드라 리크루터와 내 경력과 프로젝트들에 대한 대화가 주였다. 그럭저럭 괜찮았다. 진짜 문제는 리크루터의 마지막 질문이 비자 스폰서십이었다는 거다.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망했다”가 뇌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비자 스폰서십이 어렵다고 불합격 메일이 왔다. 코딩 인터뷰도 못 보고 떨어진 게 너무 분했다.

해외 유학생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뭐니 뭐니 해도 비자 문제다. 미국에서의 취업을 목표로 한다면 말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문제가 없지만, 졸업 후 정직원이 되는 순간 문제다. 졸업 후 유학생은 말 그대로 외국인 노동자이니 학생 비자에서 취업 비자로의 후원이 필요한 거다. 이 금액이 회사 입장에선 부담이 된다. FAANG급의 대기업이나 Quant나 Trading 쪽이 아니라면 스폰서십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비자 스폰서십은 너무나 큰 벽이었다. 첫 지원을 할 때 레쥬메를 제출할 때 몇 가지 설문들에 답한다. 스폰서십에 대한 체크 박스가 있는데 이걸 Yes로 해버리는 순간 합격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걸 몸소 경험하기도 했고, 너무나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다음 해 2월이 됐다. 이때의 심리상태는 조졌다불안함그 자체였다. 가을에 있던 그 1차 인터뷰가 마지막이었다. 매일 아침 서류 탈락 이메일들로 하루를 맞이하는 게 일상이 되어있었다.


레전드 상황 발생

여느 때와 같이 불합격 결과 듬성듬성 자리한 메일함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상한 이메일 한 줄이 머리를 삐죽 내밀고 있다. 제목부터 달랐다. 분명 Thank you for applying~ 으로 시작되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다.



이거 진짜에요?

뜬금없이 테슬라 리크루터 연락이 와있었다. 무지성 지원하다가 테슬라를 지원했던 게 흐릿하게 기억났다. 테슬라만 포지션 7개에 남발했다. 정작 지원한 팀들 말고 다른 팀에 연결을 해주겠다더라.

도파민 풀 충전 상태로 리크루터에게 답장 이메일을 보냈고 피 말리는 2주 동안의 기다림이 있었다. 매칭된 팀이 내 레쥬메를 보고 관심 있어야만 인터뷰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1차 라이브 코딩 인터뷰가 잡혔다. 평소에 손도 안 대고 있던 LeetCode (한국의 백준과 같은 사이트다) 알고리즘 문제를 준비하고, 자기소개 문구를 준비했다. 테슬라에 대해서 집착 수준으로 매일 같이 뉴스를 찾아보고, 전기차 모델 사양이나 가격들도 달달 외웠다.

다행히 LeetCode 문제가 안 나왔다. 포지션이 프런트엔드 개발이라 ReactJS 실무에 가까운 문제가 나왔다. 문제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만큼 실무는 자신 있었고 시간이 좀 걸렸지만 (자바스크립트 문법을 절어버렸다) 나쁘지 않게 인터뷰를 마쳤다.

또 한 번 피 말리는 2주의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도 최종 인터뷰를 따냈다. 끼얏호우

최종 라운드는 부서의 가장 높은 엔지니어링 매니저와 1대 1 면담으로 진행됐다. 매니저님이 팀이 하는 일, 인턴으로써 하는 일들을 소개해주는 식이었다. 마치 인터뷰의 갑과 을이 바뀐 느낌조차 들었다. 후반부는 내가 준비한 질문들을 했고, 꽤 인상적인 질문도 성공적으로 날렸다. 줌미팅이 꺼진 뒤, “됐다. 이건 됐다”라고 육성으로 외쳤다.

2주의 시간이 더 지났다. 분명 결과를 1주일 안에 준다고 했는데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떨어졌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고 개운했다. 열심히 준비했고, 최선의 퍼포먼스로 인터뷰를 봤으니. 애초에 팀에 인턴 티오가 한 자리뿐이어서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동시에 좌절감도 느꼈다. 3월 말은 링크드인에 더 이상 지원할 수 있는 공고가 줄어들고 있었다. 군대를 미룬 도박이 실패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고, 하염없이 잘못 없는 이력서를 영혼이 빠진 채 계속해서 수정하는 내 모습이 비참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봄이 도착했다.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고 있었고, 반면 난 매일 같이 모니터 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미국 인턴을 포기했다.

문득 Referral을 적극적으로 찾아볼걸. 네트워킹을 더 해볼걸이라는 후회 아닌 후회도 있었지만, 이 악물고 한글 레쥬메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에 꽉 채워야 하는 미국식 레쥬메와 달리 워딩도 바꾸고 포맷도 노션으로 바꾸는 작업을 불철주야 진행했다. 그럴듯한 이력서가 준비됐고, 몇 개의 한국 스타트업들과 대기업 몇 군데에 지원서를 넣었다.


역대급 상황 발생



다음 주 월요일에 한국 스타트업과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도서관에서 이메일 제목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진짜 5분 동안 벙찐 채 서있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 옆 자리에 앉아있던 친한 형에게 자랑 좀 했다. 말이 되냐며 머스크의 오른팔이라는 별명을 그 자리에서 만들어줬다.

더 이상 인터뷰는 없었고, Exec Review를 거친 뒤 바로 다음 날 오퍼를 받았다.



테슬라에서 근무한 지 9주가 지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 빅테크에 출퇴근하며 주말만을 기다리는 직장인이 되어버린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 겁 없이 마음먹은 그 다짐이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꿈은 크면 클수록 좋다. 사람 앞 날은 한 치 앞을 모르니.


지오님 글 더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retz8


난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정확히는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작년 1학년 때 만난 사람들, 있었던 추억들, 학교 수업 내용들도 가물가물하다.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의 얼굴은 물론 이름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 집에 있을 때, 종종 엄마와 아빠가 초등학교 얘기를 하곤 한다. 두 분은 동갑내기 동창인데, 몇십 년 전의 일들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참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다. 엄마를 좋다고 쫓아다니던 우스꽝스러운 남자아이의 이야기라든지 (사실인지 확인된 바 없다), 다리 아래 계곡에서 돌을 던지며 놀던 아빠의 한적한 시골 학교 생활이라든지.

그래도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남아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동네 로봇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흉내 내기 정도되는 블록 코딩이었지만 첫 경험으론 나쁘지 않았다.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컴퓨터에 노출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때 인터넷, 그리고 구글을 처음 접했다. 멋모르던 작은 남자아이의 꿈이 생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악마의 게임, 롤을 접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의 인기 장래희망은 세계 정복 혹은 대통령이었다. 허무맹랑하지만 거대한 꿈을 가질 수 있는 나이였고, 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구글과 같은 거대한 IT 기업의 CEO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남기겠다 다짐했다.



예정대로라면 난 지금 군대에서 상병을 달고 있어야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아직 미필이라는 거다. 다른 대학 동기 유학생들은 대부분 군대를 갔다. 치욕스럽지만 매일 같이 아직도 미필이 있냐며 단톡방에서 놀림받고 있다.

계획이 뒤바뀐 건 하루아침 만이었다. 1학년 2학기 말, 기말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미국 대학교의 2학기는 1월부터 5월까지다)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고 (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비밀이니까), 군입대를 1년 미뤘다. 이 결정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뒤바꿔놓았다.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달까. 군대를 미루는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된 근거가 있었다. 아까웠다. 내 실력이.

미국 대학생들, 특히 컴퓨터 과학 (CS) 전공자들은 긴 여름 방학 동안 인턴이나 리서치를 하는 것이 정석이다. 취업 시장이 많이 어려워진 만큼 인턴 경력의 질과 양이 중요한 셈이다. 졸업하고 밥은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물론 1학년 끝나고 인턴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는 유학생 입장에선 말이다.

코딩 실력이 우상향 중이었다. 실제 유저가 유입되는 실사용 커뮤니티 웹사이트 배포를 마쳤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2학년이 끝나고 미국에서 여름 인턴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22년 인생 중 가장 치열한 1년이 시작되었다.


다다익선 多多益善

한국 인턴 취업과 미국 인턴 취업은 비슷해 보이나 분명 결이 다르다. 미국 인턴은 물량공세다. 많아야 몇 십 개 지원하는 한국 개발자 취업과는 다르다. 링크드인에 올라오는 인턴 공고란 공고는 최대한 총알을 쏴봐야 한다. 지원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솔직히 100개도 적은 수준이다.

개발자 여름 인턴 공고는 굉장히 일찍부터 올라온다. 얼마나 이르냐면 25년 여름 인턴을 24년 9월부터 지원해야 한다. 말 그대로 대학 학기 내내 인턴 취업 준비를 병행해야 하는 셈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미국 취업 시장에서는 이력서나 프로젝트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상회할 만큼 네트워킹이 중요하다. “인맥 빨”이다. (진짜 크다, 한국의 학연, 지연보다도 더 심하다) 추천 제도인 Referral을 회사 재직자에게 받고 인턴 지원을 하면 Resume Screening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난 자존심이 상했다. 인맥 빨은 노잼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Referral을 받지 않고 인턴을 잡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물론, 딱 한 번 레퍼럴을 받아서 굉장한 퀀트 회사 라이브 코딩 인터뷰를 봤다. 떨어졌다 엉엉)

500군데 넘게 지원했다. 서류 합격은 총 3곳

1차 통과율 0.6%의 사나이


합격하기 어려운 구조

3군데 중 하나는 9월 달 말에 인터뷰를 봤다.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졌다. 유일하게 Referral을 받은 곳인데, 1차 라이브 코딩 인터뷰를 보고 떨어졌다. 그땐 무지성으로 코드를 쓰던 때라 Readability와 Scalability는 내다 버렸었다. 그게 패착이었다.

다음으로 인터뷰를 본 곳은 Samsara라는 Supply Chain와 Cloud Service를 연계한 중견 기업이다. 만족스러운 규모의 기업이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인터뷰를 봤다. 첫 번째 HR 라운드라 리크루터와 내 경력과 프로젝트들에 대한 대화가 주였다. 그럭저럭 괜찮았다. 진짜 문제는 리크루터의 마지막 질문이 비자 스폰서십이었다는 거다.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망했다”가 뇌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비자 스폰서십이 어렵다고 불합격 메일이 왔다. 코딩 인터뷰도 못 보고 떨어진 게 너무 분했다.

해외 유학생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뭐니 뭐니 해도 비자 문제다. 미국에서의 취업을 목표로 한다면 말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문제가 없지만, 졸업 후 정직원이 되는 순간 문제다. 졸업 후 유학생은 말 그대로 외국인 노동자이니 학생 비자에서 취업 비자로의 후원이 필요한 거다. 이 금액이 회사 입장에선 부담이 된다. FAANG급의 대기업이나 Quant나 Trading 쪽이 아니라면 스폰서십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비자 스폰서십은 너무나 큰 벽이었다. 첫 지원을 할 때 레쥬메를 제출할 때 몇 가지 설문들에 답한다. 스폰서십에 대한 체크 박스가 있는데 이걸 Yes로 해버리는 순간 합격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걸 몸소 경험하기도 했고, 너무나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다음 해 2월이 됐다. 이때의 심리상태는 조졌다불안함그 자체였다. 가을에 있던 그 1차 인터뷰가 마지막이었다. 매일 아침 서류 탈락 이메일들로 하루를 맞이하는 게 일상이 되어있었다.


레전드 상황 발생

여느 때와 같이 불합격 결과 듬성듬성 자리한 메일함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상한 이메일 한 줄이 머리를 삐죽 내밀고 있다. 제목부터 달랐다. 분명 Thank you for applying~ 으로 시작되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다.



이거 진짜에요?

뜬금없이 테슬라 리크루터 연락이 와있었다. 무지성 지원하다가 테슬라를 지원했던 게 흐릿하게 기억났다. 테슬라만 포지션 7개에 남발했다. 정작 지원한 팀들 말고 다른 팀에 연결을 해주겠다더라.

도파민 풀 충전 상태로 리크루터에게 답장 이메일을 보냈고 피 말리는 2주 동안의 기다림이 있었다. 매칭된 팀이 내 레쥬메를 보고 관심 있어야만 인터뷰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1차 라이브 코딩 인터뷰가 잡혔다. 평소에 손도 안 대고 있던 LeetCode (한국의 백준과 같은 사이트다) 알고리즘 문제를 준비하고, 자기소개 문구를 준비했다. 테슬라에 대해서 집착 수준으로 매일 같이 뉴스를 찾아보고, 전기차 모델 사양이나 가격들도 달달 외웠다.

다행히 LeetCode 문제가 안 나왔다. 포지션이 프런트엔드 개발이라 ReactJS 실무에 가까운 문제가 나왔다. 문제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만큼 실무는 자신 있었고 시간이 좀 걸렸지만 (자바스크립트 문법을 절어버렸다) 나쁘지 않게 인터뷰를 마쳤다.

또 한 번 피 말리는 2주의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도 최종 인터뷰를 따냈다. 끼얏호우

최종 라운드는 부서의 가장 높은 엔지니어링 매니저와 1대 1 면담으로 진행됐다. 매니저님이 팀이 하는 일, 인턴으로써 하는 일들을 소개해주는 식이었다. 마치 인터뷰의 갑과 을이 바뀐 느낌조차 들었다. 후반부는 내가 준비한 질문들을 했고, 꽤 인상적인 질문도 성공적으로 날렸다. 줌미팅이 꺼진 뒤, “됐다. 이건 됐다”라고 육성으로 외쳤다.

2주의 시간이 더 지났다. 분명 결과를 1주일 안에 준다고 했는데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떨어졌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고 개운했다. 열심히 준비했고, 최선의 퍼포먼스로 인터뷰를 봤으니. 애초에 팀에 인턴 티오가 한 자리뿐이어서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동시에 좌절감도 느꼈다. 3월 말은 링크드인에 더 이상 지원할 수 있는 공고가 줄어들고 있었다. 군대를 미룬 도박이 실패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고, 하염없이 잘못 없는 이력서를 영혼이 빠진 채 계속해서 수정하는 내 모습이 비참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봄이 도착했다.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고 있었고, 반면 난 매일 같이 모니터 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미국 인턴을 포기했다.

문득 Referral을 적극적으로 찾아볼걸. 네트워킹을 더 해볼걸이라는 후회 아닌 후회도 있었지만, 이 악물고 한글 레쥬메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에 꽉 채워야 하는 미국식 레쥬메와 달리 워딩도 바꾸고 포맷도 노션으로 바꾸는 작업을 불철주야 진행했다. 그럴듯한 이력서가 준비됐고, 몇 개의 한국 스타트업들과 대기업 몇 군데에 지원서를 넣었다.


역대급 상황 발생



다음 주 월요일에 한국 스타트업과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도서관에서 이메일 제목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진짜 5분 동안 벙찐 채 서있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 옆 자리에 앉아있던 친한 형에게 자랑 좀 했다. 말이 되냐며 머스크의 오른팔이라는 별명을 그 자리에서 만들어줬다.

더 이상 인터뷰는 없었고, Exec Review를 거친 뒤 바로 다음 날 오퍼를 받았다.



테슬라에서 근무한 지 9주가 지났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 빅테크에 출퇴근하며 주말만을 기다리는 직장인이 되어버린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 겁 없이 마음먹은 그 다짐이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꿈은 크면 클수록 좋다. 사람 앞 날은 한 치 앞을 모르니.


지오님 글 더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retz8

Unpublish ON
previous arrow
next ar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