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 도착한 첫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공항 게이트를 나서는 순간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낯선 공기가 저를 압도했습니다. 택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 풍경은 온통 새로운 이미지로 가득했고, 어디를 둘러봐도 익숙한 한글 간판 하나 보이지 않아 ‘내가 정말 멀리 와 있구나’라는 실감이 뼈저리게 들었습니다. 거리마다 우뚝 솟은 모스크의 첨탑들은 이곳이 종교적∙문화적 색채가 뚜렷한 도시임을 웅장하게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리듬이었습니다. 가게에서든 거리에서든 들려오는 터키어는 한국어와는 전혀 다른 억양을 지녔고, 영어가 섞여 나오기도 했지만, 어쩔 때는 단어 한 번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대화가 오갔습니다.
LG전자 터키사업부 사무실로 향하는 길 내내, 제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교차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조울증이 있는 내 몸과 마음, 낯선 환경에서 무사히 버텨줄까?” 하는 걱정이 불안의 형태로 스멀스멀 올라왔지요. 하지만 반면에, “이국적인 도시에서의 업무라니, 분명 큰 성장 기회가 될 거야”라는 설렘도 함께 가슴 한켠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한국 본사와 달리 팀원 대부분이 현지인이라는 점, 그리고 영어와 터키어를 오가며 협업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큰 도전이 될지 가늠조차 어려웠지만, 그 낯섦 자체가 오히려 저를 일으켜 세우는 추진력이 된다고 느꼈습니다.

인턴십의 첫 주는 비교적 간단한 오리엔테이션과 프로젝트 개요 설명으로 시작됐습니다. 회사 내부 시스템 사용 방법을 익히고, 터키사업부가 현재 추진 중인 주요 과제나 목표에 대해 개략적인 소개를 받았지요. 솔직히 이 무렵까지만 해도 “인턴이니 보조 업무만 하겠지. 중요 업무는 선배들이 다 맡고 나는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팀장님이 첫 회의를 마치자마자, “현지 소비자 트렌드 관련 조사를 시작해보면 좋겠습니다. 시장 분석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나요?”라며 저에게 주도적인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이렇게까지 믿고 맡겨주다니” 하는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가끔 현지에서 터키어로 주고받는 용어까지 스쳐 들리면 머리가 복잡해지곤 했습니다. 그래도 “이게 바로 날 위한 자리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묘하게 솟았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 ‘내가 있음으로써 팀이 좀 더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감각은 앞으로의 인턴십을 버텨내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물론 일이 본격화되자, 조울증으로 인한 기분 변동이 세게 몰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문화 차이와 언어 장벽에서 오는 피로감이 쌓이는 날이면, 평소보다 몇 배의 에너지가 더 소진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자료 조사를 하고 회의 준비를 하다가도, 갑자기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져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었지요. 그럴 때면 “내 탓인가? 혹시 내가 팀 진행을 늦추는 건 아닐까?” 하는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더욱이 해외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마음이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문득 크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운이 좋았던 건, 사수 격인 선배와 현지 동료들이 저를 정말 ‘한 사람’으로 존중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 날이면 먼저 다가와 “오늘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네요. 혹시 쉬어야 할 것 같으면 미리 말해줘요.”라고 스스럼없이 권유하곤 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도 회사 생활을 해봤지만, 상대적으로 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해, 어디선가 “무리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동료들의 한마디는, 그래서인지 저를 묵직하게 위로해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주를 보내고 나면, 주말마다 탁심(Taksim) 광장이나 보스포루스 해협을 찾아 바람을 쐬곤 했습니다. 초기에 몸이 지쳐 있어도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가서 이국적 풍경에 몸을 맡기는 습관을 들였지요. 파란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해협과, 제각기 다른 색으로 집들이 들어선 언덕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달콤한 차이를 마시며 “내가 이 먼 곳까지 와서 일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시간이 주말마다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번 주는 힘들었지만 잘 버텼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라고 다독이곤 했습니다.

몇 번의 주말이 지나고 나니, 낯선 사무실 풍경과 동료들의 말투도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터키어로 된 간단한 인사말쯤은 입에서 저절로 나올 정도가 되었고, “이제야 내가 팀에서 나름 역할을 하고 있구나. 장애나 두려움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임무가 더 크고 가치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 정도면 충분할까?”라는 의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업무가 늘어날수록 제 시간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고민이 커졌고, 외국 생활의 긴장감은 사소한 사건에도 감정 기복을 크게 요동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탄불에서 마주한 크고 작은 도전들은 하루하루가 ‘운명적인 합격’의 연장선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일했다면, 아마 이 정도 규모의 언어·문화적 장벽을 매일 맞닥뜨릴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그 극복 과정에서 저는 ‘장애가 꼭 약점만은 아니구나, 때때로 색다른 시각과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구나’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그리고 회사 역시 이러한 제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간단한 보고 정도만 도와주세요”라고 했던 미션이, 시간이 갈수록 “현지 시장 조사에 의견을 보태달라”거나 “마케팅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일들을 맡아가며 업무 능력을 키워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없으면 약간 불편해진다’는 팀 반응을 느끼게 되었지요. 제가 숨이 차도록 노력한 만큼, 회사 역시 그만큼의 성장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결국, 이스탄불에서의 인턴십은 제게 여러모로 결핍과 강점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겪거나, 낯선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우왕좌왕할 때마다 조울증의 영향으로 걱정이 배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저 스스로의 ‘버텨보자’는 의지가 맞물려, 한 단계씩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몇 달간의 시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엔 이스탄불 풍경이 마치 내 집 앞 골목처럼 편안해 보였고, 팀원들과의 짧은 작별인사가 애틋하게 느껴졌습니다.
돌아보면,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해외 사업장에서 쌓은 업무 경험은 제 이력뿐 아니라 내면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그리고 완벽하지 않아도, 내가 가진 고유한 시선과 노력이 팀에 기여할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앞으로 제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작은 용기를 계속해서 불어넣어줄 것입니다.
짧다면 짧았던 이스탄불에서의 몇 달은 분명한 시발점이었습니다. 내 자신을 의심하던 태도에서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긍정으로,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매일 조금씩 발전한다’는 설렘으로 바꿔놓았으니까요. 누군가 해외 인턴십 경험을 물어본다면, 저는 조금은 자랑스럽게 “이스탄불에서의 시간이 제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주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애와 불안을 안고도, 세상 어디에서든 제 몫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이 제가 이스탄불에서 건져올린 가장 큰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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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 도착한 첫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공항 게이트를 나서는 순간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낯선 공기가 저를 압도했습니다. 택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 풍경은 온통 새로운 이미지로 가득했고, 어디를 둘러봐도 익숙한 한글 간판 하나 보이지 않아 ‘내가 정말 멀리 와 있구나’라는 실감이 뼈저리게 들었습니다. 거리마다 우뚝 솟은 모스크의 첨탑들은 이곳이 종교적∙문화적 색채가 뚜렷한 도시임을 웅장하게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리듬이었습니다. 가게에서든 거리에서든 들려오는 터키어는 한국어와는 전혀 다른 억양을 지녔고, 영어가 섞여 나오기도 했지만, 어쩔 때는 단어 한 번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대화가 오갔습니다.
LG전자 터키사업부 사무실로 향하는 길 내내, 제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교차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조울증이 있는 내 몸과 마음, 낯선 환경에서 무사히 버텨줄까?” 하는 걱정이 불안의 형태로 스멀스멀 올라왔지요. 하지만 반면에, “이국적인 도시에서의 업무라니, 분명 큰 성장 기회가 될 거야”라는 설렘도 함께 가슴 한켠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한국 본사와 달리 팀원 대부분이 현지인이라는 점, 그리고 영어와 터키어를 오가며 협업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큰 도전이 될지 가늠조차 어려웠지만, 그 낯섦 자체가 오히려 저를 일으켜 세우는 추진력이 된다고 느꼈습니다.

인턴십의 첫 주는 비교적 간단한 오리엔테이션과 프로젝트 개요 설명으로 시작됐습니다. 회사 내부 시스템 사용 방법을 익히고, 터키사업부가 현재 추진 중인 주요 과제나 목표에 대해 개략적인 소개를 받았지요. 솔직히 이 무렵까지만 해도 “인턴이니 보조 업무만 하겠지. 중요 업무는 선배들이 다 맡고 나는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팀장님이 첫 회의를 마치자마자, “현지 소비자 트렌드 관련 조사를 시작해보면 좋겠습니다. 시장 분석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나요?”라며 저에게 주도적인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이렇게까지 믿고 맡겨주다니” 하는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가끔 현지에서 터키어로 주고받는 용어까지 스쳐 들리면 머리가 복잡해지곤 했습니다. 그래도 “이게 바로 날 위한 자리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묘하게 솟았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 ‘내가 있음으로써 팀이 좀 더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감각은 앞으로의 인턴십을 버텨내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물론 일이 본격화되자, 조울증으로 인한 기분 변동이 세게 몰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문화 차이와 언어 장벽에서 오는 피로감이 쌓이는 날이면, 평소보다 몇 배의 에너지가 더 소진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자료 조사를 하고 회의 준비를 하다가도, 갑자기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져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었지요. 그럴 때면 “내 탓인가? 혹시 내가 팀 진행을 늦추는 건 아닐까?” 하는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더욱이 해외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마음이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문득 크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운이 좋았던 건, 사수 격인 선배와 현지 동료들이 저를 정말 ‘한 사람’으로 존중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 날이면 먼저 다가와 “오늘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네요. 혹시 쉬어야 할 것 같으면 미리 말해줘요.”라고 스스럼없이 권유하곤 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도 회사 생활을 해봤지만, 상대적으로 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해, 어디선가 “무리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동료들의 한마디는, 그래서인지 저를 묵직하게 위로해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주를 보내고 나면, 주말마다 탁심(Taksim) 광장이나 보스포루스 해협을 찾아 바람을 쐬곤 했습니다. 초기에 몸이 지쳐 있어도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가서 이국적 풍경에 몸을 맡기는 습관을 들였지요. 파란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해협과, 제각기 다른 색으로 집들이 들어선 언덕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달콤한 차이를 마시며 “내가 이 먼 곳까지 와서 일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시간이 주말마다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번 주는 힘들었지만 잘 버텼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라고 다독이곤 했습니다.

몇 번의 주말이 지나고 나니, 낯선 사무실 풍경과 동료들의 말투도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터키어로 된 간단한 인사말쯤은 입에서 저절로 나올 정도가 되었고, “이제야 내가 팀에서 나름 역할을 하고 있구나. 장애나 두려움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임무가 더 크고 가치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 정도면 충분할까?”라는 의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업무가 늘어날수록 제 시간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고민이 커졌고, 외국 생활의 긴장감은 사소한 사건에도 감정 기복을 크게 요동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탄불에서 마주한 크고 작은 도전들은 하루하루가 ‘운명적인 합격’의 연장선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일했다면, 아마 이 정도 규모의 언어·문화적 장벽을 매일 맞닥뜨릴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그 극복 과정에서 저는 ‘장애가 꼭 약점만은 아니구나, 때때로 색다른 시각과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구나’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그리고 회사 역시 이러한 제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간단한 보고 정도만 도와주세요”라고 했던 미션이, 시간이 갈수록 “현지 시장 조사에 의견을 보태달라”거나 “마케팅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일들을 맡아가며 업무 능력을 키워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없으면 약간 불편해진다’는 팀 반응을 느끼게 되었지요. 제가 숨이 차도록 노력한 만큼, 회사 역시 그만큼의 성장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결국, 이스탄불에서의 인턴십은 제게 여러모로 결핍과 강점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겪거나, 낯선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우왕좌왕할 때마다 조울증의 영향으로 걱정이 배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저 스스로의 ‘버텨보자’는 의지가 맞물려, 한 단계씩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몇 달간의 시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엔 이스탄불 풍경이 마치 내 집 앞 골목처럼 편안해 보였고, 팀원들과의 짧은 작별인사가 애틋하게 느껴졌습니다.
돌아보면,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해외 사업장에서 쌓은 업무 경험은 제 이력뿐 아니라 내면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그리고 완벽하지 않아도, 내가 가진 고유한 시선과 노력이 팀에 기여할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앞으로 제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작은 용기를 계속해서 불어넣어줄 것입니다.
짧다면 짧았던 이스탄불에서의 몇 달은 분명한 시발점이었습니다. 내 자신을 의심하던 태도에서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긍정으로,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매일 조금씩 발전한다’는 설렘으로 바꿔놓았으니까요. 누군가 해외 인턴십 경험을 물어본다면, 저는 조금은 자랑스럽게 “이스탄불에서의 시간이 제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주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애와 불안을 안고도, 세상 어디에서든 제 몫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이 제가 이스탄불에서 건져올린 가장 큰 선물입니다.
Youhan Kim님 글 더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youh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