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회사는 없었다


안정은 답답했고, 배움은 위태로웠다.


승무원을 그만두고, 8개월의 백수생활을 한 뒤 처음 입사한 곳은,

이름만 들으면 다 알 만한, 꽤나 보수적인 중견회사였다.

당시 나는 승무원을 그만둔 후 제일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보겠다며 눈에 띄는 밝은 탈색 머리였는데,

면접 당시 나의 모든 부분들이 마음에 들었으나 머리 색 때문에 합격 결정을 고민된다고 했다.


그 회사는 나의 실력보다 나라는 사람을 보고 뽑았다.

물론 최초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탓도 있겠지만,

기존 구성원들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신입이라기엔 나이도 많고, 경력도 없었지만, 내 도전하는 용기를 크게 사주셨다.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과 면접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1년도 안 된 신입사원부터 30년 재직자까지 다양한 나이와 다양한 경력의 직원들이 있었는데,

나는 사원들 중 최고령이었고, 직책자 중 막내이신 분과 10살 정도 차이가 났다.

늘 다양한 사람을 상대해 온 나는, 사원들과 직책자들의 가교 역할을 꽤나 잘했다.


업무적으로는 회사의 홈페이지를 담당했다.

웹퍼블리셔는 “그림”인 웹디자인 시안을 그대로 코딩을 통해 홈페이지에 구현하는 역할을 하는데,

디자이너들은 내게 일을 맡기면, 결과 피드백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10대 때 1세대 아이돌 축전 만들던 실력으로 포토샵도 쉽게 다루었고,

트렌디한 디자인툴에도 쉽게 적응했다.

3개월 만에 정규직 제안을 받았고, 2년 정도 일했다.

업무도 많지 않았고, 6시 땡 하길 기다려서 바로 PC를 끄고 퇴근하는 나날이었다.


업무가 익숙해지니 다시 배움의 욕구가 싹텄다.

이 업계에 들어올 때부터 나는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목표였고,

웹퍼블리셔는 거기로 가는 과정이었다.

퇴근 후 동영상 강의를 보며 혼자 공부했다.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만들어보는 게 재밌었다.

안정적이고 여유롭지만, 새로운 목표를 꿈꾸며 2년 만에 이직을 했다.




두 번째 회사는 완전히 달랐다.

20명도 안 되는 작은 리액트 전문 에이전시였다.

대표는 나보다 1살 많았고, 젊은 남자직원들이 대부분으로 평균 연령 자체가 낮았다.

대표는 개발 능력은 뛰어났지만, 직원들에게 막말을 일삼았고,

화가 나면 키보드를 내려쳐서 키캡이 사무실 구석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했다.

나는 여자에,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 그렇게까지 대하진 않았는데,

입사동기인 20대 동료는 매일같이 불려 가 혼이 나곤 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곳을 버텼던 이유는, 띠동갑 팀장 때문이었다.

위로가 아닌 밑으로 띠동갑.

마이스터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웹디자인부터 프론트, 백엔드개발까지 모두 가능한 능력자였는데,

머리도 어찌나 좋은지 대표가 개떡 같은 오더를 내려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팀장에게 코드리뷰를 받을 때면,

나의 부족한 실력이 여실히 드러났고,

나이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지적할 때면 자존심은 상했지만,

당시의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피드백을 해주었다.


팀장만 보고 그를 표방하며 7개월 정도 일했을 때,

회사의 재정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4대 보험은 3달이 밀려있었고,

하다못해 월급이 안 나오기 시작했다.

이직하고 1년도 안 됐지만, 실업급여받는 백수가 되었다.




안정적이지만 답답했던 첫 회사.

배움은 컸지만 위태로웠던 두 번째 회사.


너무나도 정반대의 경험이었지만,

극과 극을 경험했으니, 앞으론 중간 정도 되는 회사를 가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완벽한 회사는 없었다.



Giagraphy님 글 더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giagraphy


안정은 답답했고, 배움은 위태로웠다.


승무원을 그만두고, 8개월의 백수생활을 한 뒤 처음 입사한 곳은,

이름만 들으면 다 알 만한, 꽤나 보수적인 중견회사였다.

당시 나는 승무원을 그만둔 후 제일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보겠다며 눈에 띄는 밝은 탈색 머리였는데,

면접 당시 나의 모든 부분들이 마음에 들었으나 머리 색 때문에 합격 결정을 고민된다고 했다.


그 회사는 나의 실력보다 나라는 사람을 보고 뽑았다.

물론 최초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탓도 있겠지만,

기존 구성원들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신입이라기엔 나이도 많고, 경력도 없었지만, 내 도전하는 용기를 크게 사주셨다.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과 면접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1년도 안 된 신입사원부터 30년 재직자까지 다양한 나이와 다양한 경력의 직원들이 있었는데,

나는 사원들 중 최고령이었고, 직책자 중 막내이신 분과 10살 정도 차이가 났다.

늘 다양한 사람을 상대해 온 나는, 사원들과 직책자들의 가교 역할을 꽤나 잘했다.


업무적으로는 회사의 홈페이지를 담당했다.

웹퍼블리셔는 “그림”인 웹디자인 시안을 그대로 코딩을 통해 홈페이지에 구현하는 역할을 하는데,

디자이너들은 내게 일을 맡기면, 결과 피드백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10대 때 1세대 아이돌 축전 만들던 실력으로 포토샵도 쉽게 다루었고,

트렌디한 디자인툴에도 쉽게 적응했다.

3개월 만에 정규직 제안을 받았고, 2년 정도 일했다.

업무도 많지 않았고, 6시 땡 하길 기다려서 바로 PC를 끄고 퇴근하는 나날이었다.


업무가 익숙해지니 다시 배움의 욕구가 싹텄다.

이 업계에 들어올 때부터 나는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목표였고,

웹퍼블리셔는 거기로 가는 과정이었다.

퇴근 후 동영상 강의를 보며 혼자 공부했다.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만들어보는 게 재밌었다.

안정적이고 여유롭지만, 새로운 목표를 꿈꾸며 2년 만에 이직을 했다.




두 번째 회사는 완전히 달랐다.

20명도 안 되는 작은 리액트 전문 에이전시였다.

대표는 나보다 1살 많았고, 젊은 남자직원들이 대부분으로 평균 연령 자체가 낮았다.

대표는 개발 능력은 뛰어났지만, 직원들에게 막말을 일삼았고,

화가 나면 키보드를 내려쳐서 키캡이 사무실 구석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했다.

나는 여자에,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 그렇게까지 대하진 않았는데,

입사동기인 20대 동료는 매일같이 불려 가 혼이 나곤 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곳을 버텼던 이유는, 띠동갑 팀장 때문이었다.

위로가 아닌 밑으로 띠동갑.

마이스터고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웹디자인부터 프론트, 백엔드개발까지 모두 가능한 능력자였는데,

머리도 어찌나 좋은지 대표가 개떡 같은 오더를 내려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팀장에게 코드리뷰를 받을 때면,

나의 부족한 실력이 여실히 드러났고,

나이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지적할 때면 자존심은 상했지만,

당시의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피드백을 해주었다.


팀장만 보고 그를 표방하며 7개월 정도 일했을 때,

회사의 재정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4대 보험은 3달이 밀려있었고,

하다못해 월급이 안 나오기 시작했다.

이직하고 1년도 안 됐지만, 실업급여받는 백수가 되었다.




안정적이지만 답답했던 첫 회사.

배움은 컸지만 위태로웠던 두 번째 회사.


너무나도 정반대의 경험이었지만,

극과 극을 경험했으니, 앞으론 중간 정도 되는 회사를 가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완벽한 회사는 없었다.



Giagraphy님 글 더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giagraphy

Unpublish ON
previous arrow
next ar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