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 다닌 지 4일 차만에, 이전에 지원한 대기업에서도 최종 합격 연락이 왔다. 이렇게 꼬여버린 건 대기업의 전형적인 느린 시스템 때문이었다. 전형 과정만 한 달, 입사까지는 거의 두 달이 걸리는 그런 길고 긴 채용 과정 말이다. 사실 나는 대기업 결과가 어떻든 간에 자신감 있게 스타트업에 다니려고 했다. 실질적인 경쟁력 없이 대기업 명찰만 보고 다니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닥치고 보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두 기업을 정리하자면 대충 이렇다.
[스타트업]
*장점
– 신규 개발 중인 게임
– 내가 재밌어하는 장르의 게임
–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진정성
– 언제든 자유롭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분위기
– 개발 초기부터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음
*단점
– 포괄임금제
– 기본 복지
– 의무 야근(크런치)
– 명절에도 나와서 일할 수 있음
– 투자를 받지 못할 경우, 몇 개월 후 폐업할 수 있음
[대기업]
*장점
– 비포괄임금제
– 업계 최고의 복지와 대우
– 프로젝트 안정성(망할 일 없음)
– 누구나 아는 대기업 명찰(커리어)
*단점
– 출시한 지 오래된 게임
– 내가 즐기지 않는 장르의 게임
– 평소 즐기지 않던 게임에 시간과 돈을 상당수 투자해야 함
– 숨 막히는 사내 정치와 경쟁
– 분업화되어 프로젝트의 일부분만 경험
– 현재 회사(스타트업)를 2주 만에 버리고 도망간다는 부끄러움
이렇게 적고 보니 명확해졌다.
결국 꿈 vs 현실의 첨예한 대립이다.
대기업 최종 합격 연락을 받고 나서, 무려 열흘 간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쓴다. 최종 합격 이후에도 대기업의 서류 검토, 연봉 제안 등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스타트업 대표님, 팀장님과 상담을 마쳤고, 돌아오는 월요일까지 마음을 정해야 한다. 정말 이 열흘 동안 출퇴근하면서, 운동하면서, 잠을 자다가 깨면서까지 계속 고민을 했다.
나와 연차가 비슷한 주변 사람들은 대체 왜 고민을 하냐며 “당연히 대감집(대기업)이지!”라고 말한다. 설령 맘에 안 들어 이직을 하더라도 대감집에서 이직하라는 이야기다. 그래. 그것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 가치관에는 그게 잘 맞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든 게임업계에 있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라는 정말 개같이 지독한 가치관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스타트업은 그에 가장 걸맞은 곳이다. 하지만 대기업이 주는 안정성과 엄청난 복지, 그리고 커리어는 계속 그 가치관을 비집고 들어왔다. 심지어 이 스타트업은 당장 몇 달 후에 없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자연스럽게 합리화가 됐다. 대기업도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게임업계잖아? 비록 그 게임이 내가 즐기지 않는 게임일지라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검증된 게임이잖아? 그럼 나도 프로로서, 그 게임을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도록 투자하고 노력하면 되잖아?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그런 건 일상다반사니까. 사실 이미 그렇게 많이 해봤잖아?
게임. 직무. 복지. 연봉. 미래. 가치관. 태도. 자존심. 꿈. 현실. 이런 주제들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부딪쳤다. 아침에는 스타트업이었다가, 저녁에는 다시 대기업에 가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다음 날 다시 스타트업으로 바뀌었다가, 또 그다음 날 대기업으로 바뀌는 날들이 반복됐다. 스타트업 대표님과 팀장님은 그런 나의 고민을 듣고, 나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 글을 쓰며 하나씩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렸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거짓말하지 않는, 카뮈의 언어를 따르면 – 부조리에 반항하는 사람이다. 카뮈의 사상에서는 사실 대기업이냐 스타트업이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작중의 뫼르소 역시 파리 사업소에 갈 생각 있냐는 사장의 좋은 제안을 거절한다. 엄밀히 말하면 삶이라는 본질에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물론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다. 뫼르소는 친구의 사건에 휘말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실제 그 사건과 무관한 이야기들을 근거로 사형을 선고받고, 생을 마감한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자신을 면회온 사제에게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는 부분은 독자의 마음을 크게 울린다.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군, 안 그래?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 만도 못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아.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았고,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어. 나는 이건 했고 저건 하지 않았어. 나는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어. 그러니 어떻다는 거야?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나의 정당성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난 그 까닭을 알아. 신부인 그 역시 그 까닭을 알아.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들,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들,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오직 하나의 운명만이 나 자신을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수십억의 특권 가진 사람들을 택하도록 되어 있는데 말이야. 이해하겠어? 이해하겠느냐고?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야.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장차 사형 선고를 받을 거야. 신부인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거야. 만약에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당하고 자기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게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야. 자동인형 같은 그 키 작은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나, 또 내가 결혼해 주기를 바랐던 마리나 다 마찬가지로 죄인이야. 셀레스트는 레몽보다 낫지만, 레몽이 셀레스트 못지않은 내 친구라는 게 무슨 상관이야? 마리가 오늘 또 다른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바치고 있단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도대체 이해하기나 하는 거야? 이 사형수를, 그리고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사람은 결국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무의미함’ 속에서 모든 사람들의 열망은 무너진다. 모든 수고는 결국 헛되이 끝날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저 잠시 회피할 뿐이다. 결국 이것을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삶을 직시하는 열정, 반항, 그런 태도로 죽음마저 내 것으로 만드는 태도가 삶의 의미라고, 카뮈는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 고민이 참 사소해졌다. 스타트업에 남든, 대기업에 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령 지금의 스타트업이 정말 운이 좋지 않아 몇 개월 후에 없어진다 한들, 그게 어떻단 말인가? 취업은 다시 하면 된다. 그런 건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지금의 스타트업에서 재밌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대해, 차가운 세상은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않는다. 사실 세상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다. 말 그대로 ‘비이성적이고 차가운 침묵’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게임을 붙잡고 만들고 있나.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어쩌면 사형수가 되어 처형당하는 뫼르소처럼, 나 또한 그것을 알고 걸어가는 사람인 건가. 단두대가 고장 날 확률 따위에 희망을 걸지 않고, 이 수고가 헛되이 끝날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묵묵히 걸어가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카뮈가 살아생전에 자신의 사상을 담은 글을 쓰고 또 쓴 것처럼.
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대체 나는 뭘 하고 싶은가. 나는 앞서 3개의 회사를 거치며 전반적으로 올드한 테마와 장르를 가진, 내가 진정 즐기지 않는 게임들만 만들어봤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에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비로소 이 스타트업에서 내가 해보고 싶은 장르와 비주얼을 만났는데, 이런 프로젝트를 불과 몇 개월 만에 포기해야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너무나 슬플 뿐이다. 물론 잘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 이게 잘 될 거라는 희망도 걸지 않겠다. 다만 그냥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정녕의 최선을.
낭만은 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진심이 남는다.
현실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거짓말이 남는다.
세상은 아무 말이 없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을 더 중요시한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거짓말들은 일상이 되어서 이제 뭐가 진실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내가 맨 처음 게임 기자라는 직업으로 커리어를 시작할 때, “진짜를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건 지금도 동일하다. 진짜. 그리고 진심. 그래서 어떻게든 글을 쓰겠다고 지금까지 돈도 안되는 글 모임을 붙잡고 있는 거 아니었나. 분명 이렇게 진심을 남기면, 길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이제 그것조차 믿지 않기로 했다. 그저 묵묵히 나가서 그런 고통마저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나는 월요일에 스타트업 대표님께 이 회사에 남겠다는 말을 전할 것이다.
유재우님 글 더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glowmofficial
스타트업에 다닌 지 4일 차만에, 이전에 지원한 대기업에서도 최종 합격 연락이 왔다. 이렇게 꼬여버린 건 대기업의 전형적인 느린 시스템 때문이었다. 전형 과정만 한 달, 입사까지는 거의 두 달이 걸리는 그런 길고 긴 채용 과정 말이다. 사실 나는 대기업 결과가 어떻든 간에 자신감 있게 스타트업에 다니려고 했다. 실질적인 경쟁력 없이 대기업 명찰만 보고 다니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닥치고 보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두 기업을 정리하자면 대충 이렇다.
[스타트업]
*장점
– 신규 개발 중인 게임
– 내가 재밌어하는 장르의 게임
–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진정성
– 언제든 자유롭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분위기
– 개발 초기부터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음
*단점
– 포괄임금제
– 기본 복지
– 의무 야근(크런치)
– 명절에도 나와서 일할 수 있음
– 투자를 받지 못할 경우, 몇 개월 후 폐업할 수 있음
[대기업]
*장점
– 비포괄임금제
– 업계 최고의 복지와 대우
– 프로젝트 안정성(망할 일 없음)
– 누구나 아는 대기업 명찰(커리어)
*단점
– 출시한 지 오래된 게임
– 내가 즐기지 않는 장르의 게임
– 평소 즐기지 않던 게임에 시간과 돈을 상당수 투자해야 함
– 숨 막히는 사내 정치와 경쟁
– 분업화되어 프로젝트의 일부분만 경험
– 현재 회사(스타트업)를 2주 만에 버리고 도망간다는 부끄러움
이렇게 적고 보니 명확해졌다.
결국 꿈 vs 현실의 첨예한 대립이다.
대기업 최종 합격 연락을 받고 나서, 무려 열흘 간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쓴다. 최종 합격 이후에도 대기업의 서류 검토, 연봉 제안 등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스타트업 대표님, 팀장님과 상담을 마쳤고, 돌아오는 월요일까지 마음을 정해야 한다. 정말 이 열흘 동안 출퇴근하면서, 운동하면서, 잠을 자다가 깨면서까지 계속 고민을 했다.
나와 연차가 비슷한 주변 사람들은 대체 왜 고민을 하냐며 “당연히 대감집(대기업)이지!”라고 말한다. 설령 맘에 안 들어 이직을 하더라도 대감집에서 이직하라는 이야기다. 그래. 그것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 가치관에는 그게 잘 맞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든 게임업계에 있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라는 정말 개같이 지독한 가치관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스타트업은 그에 가장 걸맞은 곳이다. 하지만 대기업이 주는 안정성과 엄청난 복지, 그리고 커리어는 계속 그 가치관을 비집고 들어왔다. 심지어 이 스타트업은 당장 몇 달 후에 없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자연스럽게 합리화가 됐다. 대기업도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게임업계잖아? 비록 그 게임이 내가 즐기지 않는 게임일지라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검증된 게임이잖아? 그럼 나도 프로로서, 그 게임을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도록 투자하고 노력하면 되잖아?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그런 건 일상다반사니까. 사실 이미 그렇게 많이 해봤잖아?
게임. 직무. 복지. 연봉. 미래. 가치관. 태도. 자존심. 꿈. 현실. 이런 주제들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부딪쳤다. 아침에는 스타트업이었다가, 저녁에는 다시 대기업에 가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다음 날 다시 스타트업으로 바뀌었다가, 또 그다음 날 대기업으로 바뀌는 날들이 반복됐다. 스타트업 대표님과 팀장님은 그런 나의 고민을 듣고, 나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 글을 쓰며 하나씩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렸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거짓말하지 않는, 카뮈의 언어를 따르면 – 부조리에 반항하는 사람이다. 카뮈의 사상에서는 사실 대기업이냐 스타트업이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작중의 뫼르소 역시 파리 사업소에 갈 생각 있냐는 사장의 좋은 제안을 거절한다. 엄밀히 말하면 삶이라는 본질에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물론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다. 뫼르소는 친구의 사건에 휘말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실제 그 사건과 무관한 이야기들을 근거로 사형을 선고받고, 생을 마감한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자신을 면회온 사제에게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는 부분은 독자의 마음을 크게 울린다.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군, 안 그래?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 만도 못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아.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았고,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어. 나는 이건 했고 저건 하지 않았어. 나는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어. 그러니 어떻다는 거야?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나의 정당성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난 그 까닭을 알아. 신부인 그 역시 그 까닭을 알아.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들,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들,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오직 하나의 운명만이 나 자신을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수십억의 특권 가진 사람들을 택하도록 되어 있는데 말이야. 이해하겠어? 이해하겠느냐고?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야.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장차 사형 선고를 받을 거야. 신부인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거야. 만약에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당하고 자기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게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야. 자동인형 같은 그 키 작은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나, 또 내가 결혼해 주기를 바랐던 마리나 다 마찬가지로 죄인이야. 셀레스트는 레몽보다 낫지만, 레몽이 셀레스트 못지않은 내 친구라는 게 무슨 상관이야? 마리가 오늘 또 다른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바치고 있단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도대체 이해하기나 하는 거야? 이 사형수를, 그리고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사람은 결국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무의미함’ 속에서 모든 사람들의 열망은 무너진다. 모든 수고는 결국 헛되이 끝날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저 잠시 회피할 뿐이다. 결국 이것을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삶을 직시하는 열정, 반항, 그런 태도로 죽음마저 내 것으로 만드는 태도가 삶의 의미라고, 카뮈는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 고민이 참 사소해졌다. 스타트업에 남든, 대기업에 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령 지금의 스타트업이 정말 운이 좋지 않아 몇 개월 후에 없어진다 한들, 그게 어떻단 말인가? 취업은 다시 하면 된다. 그런 건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지금의 스타트업에서 재밌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대해, 차가운 세상은 아무런 답도 내려주지 않는다. 사실 세상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다. 말 그대로 ‘비이성적이고 차가운 침묵’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게임을 붙잡고 만들고 있나.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어쩌면 사형수가 되어 처형당하는 뫼르소처럼, 나 또한 그것을 알고 걸어가는 사람인 건가. 단두대가 고장 날 확률 따위에 희망을 걸지 않고, 이 수고가 헛되이 끝날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묵묵히 걸어가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카뮈가 살아생전에 자신의 사상을 담은 글을 쓰고 또 쓴 것처럼.
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대체 나는 뭘 하고 싶은가. 나는 앞서 3개의 회사를 거치며 전반적으로 올드한 테마와 장르를 가진, 내가 진정 즐기지 않는 게임들만 만들어봤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에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비로소 이 스타트업에서 내가 해보고 싶은 장르와 비주얼을 만났는데, 이런 프로젝트를 불과 몇 개월 만에 포기해야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너무나 슬플 뿐이다. 물론 잘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 이게 잘 될 거라는 희망도 걸지 않겠다. 다만 그냥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정녕의 최선을.
낭만은 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진심이 남는다.
현실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거짓말이 남는다.
세상은 아무 말이 없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을 더 중요시한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거짓말들은 일상이 되어서 이제 뭐가 진실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내가 맨 처음 게임 기자라는 직업으로 커리어를 시작할 때, “진짜를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건 지금도 동일하다. 진짜. 그리고 진심. 그래서 어떻게든 글을 쓰겠다고 지금까지 돈도 안되는 글 모임을 붙잡고 있는 거 아니었나. 분명 이렇게 진심을 남기면, 길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이제 그것조차 믿지 않기로 했다. 그저 묵묵히 나가서 그런 고통마저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나는 월요일에 스타트업 대표님께 이 회사에 남겠다는 말을 전할 것이다.
유재우님 글 더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glowmoffici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