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선택의 기준


(한국 편)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집에서 해라.”

이 말은 인터넷에 떠도는 격언(?)으로, 회사 생활은 기본적으로 머슴살이와 다를 바 없다는 자조이자 이왕 회사 생활을 할 거면 떨어질 콩고물이 상대적으로 많은, 처우가 좋은 대(大) 기업에서 회사 생활을 하라는 당부를 담은 말이다.

그간 두 개 나라 여덟 개 회사에서 다양한 머슴살이를 해온 나로서도 이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100% 동의할 수만은 없다. 대감집(대기업)과 여느 양반집(중소기업)을 오간 일곱 번의 이직 과정에서 그때그때마다 나에게 필요한 선택을 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왕 지난 회사 생활을 돌아보는 큰 회고를 하기로 했으니 하나하나 떠올려 보자. 왜 그 회사를 선택했고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이 아쉬웠고 무엇 때문에 떠나기로 했는지. 그 속에서 누군가는 회사 선택의 기준에 대한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1. 국내 중소 IT 회사 B 게임즈 (2007 – 2009)

지금은 사명이 바뀌었지만 당시 사명은 B 게임즈로, 영화 및 게임을 제작하는 국내 중소기업이었다. 나는 앞서 언급한 메타버스 서비스인 ‘세컨드 라이프’의 국내 현지화 프로젝트 팀에서 약 일 년 반동안 서비스 기획자로 일했는데, 내가 맡은 프로젝트가 이 회사의 주력 아이템인 영화나 게임이 아니었기에 갓 신설된 프로젝트 팀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 실적 압박 없이 – 일할 수 있었다.

팀원은 팀장 포함 7명 정도로, 멤버 대부분이 주니어인 팀이었다. 메타버스라는 전례가 없던 서비스를 다뤄야 하다 보니 이 분야에 경험 있는 사람 자체가 없어서 모두가 맨 땅에 헤딩을 하며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가야 했다. 때문에 나는 입사 첫날부터 메인 기획자가 되어 근본도 없이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IT 회사의 서비스 기획자가 기획서를 어떻게 써야 하고 프로젝트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참고할 레퍼런스가 없었기에 이 시기의 나는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진심 전력을 다해 일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왜 만들려고 하는지, 그것을 기획서에 어떻게 담고 팀원들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일이 잘 굴러갈 것인지 등, 각 과업의 목적을 0에서부터 정의하며 본능적으로 일했다. 돌아보면 이때가 가장 원초적인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하며 일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긍정적인 기억을 뒤집어 말하면, 보고 배울 게 그리 많지 않은 환경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좀 더 규모가 큰 다른 회사들을 겪다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야생에서 살아남았다고.


#2. #3. 국내 S 대기업 IT 계열사 (2009-2011)

첫 번째 회사에서 맡은 메타버스 프로젝트의 성과가 지지부진해 프로젝트 팀의 미래도 내 커리어도 막막해질 즈음, 한 대기업 IT 계열사에서 인터뷰 제안을 받았다. 메타버스 프로젝트 경험이 있는 사원급 서비스 기획자를 채용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당시 IT 업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좁았고, 국내에서 메타버스 경험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가능했던 일일 테다.

지나 보니 회사 규모가 작더라도 유니크한 프로젝트를 해봤던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남다른 한 줄의 유니크함이 또 다른 커리어 확장과 연결될 수도 있으니. 그렇게 나는 두 번째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고, 일 년 뒤 내가 속했던 메타버스 관련 사내 CIC(Company-In-Company) 조직의 해체로 같은 S 대기업 내의 또 다른 IT 계열사로 이동해 세 번째 회사와 만나게 된다.

이 두 대기업 IT 계열사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회사는 개개인의 기량이 아닌 시스템으로 굴러간다’는 것과 앞의 말과 얼핏 모순되어 보이지만 ‘세상에 날고 기는 사람은 많고 보고 배울 실력자는 도처에 널려 있구나’였다. 한마디로, 회사의 시스템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배울 게 많았다. 어찌 보면 체계화된 시스템 속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도 상향 평준화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당시 나는 사원에서 대리로 진급해 한참 일을 배워가고 성장하는 시기였다. 체계적인 업무 프로세스(기획 > 디자인 > 개발 > QA > 론칭 > 운영)와 경험 많은 선배들과 능력 있는 동료들과 주고받은 이메일, 문서, 대화, 미팅, 의사 결정 등의 레퍼런스를 재료로, 이후로도 내 업무능력의 바탕이 되어 준 기본기를 갈고닦을 수 있었다. 대기업이었던 만큼 연봉이나 복지도 첫 회사에 비해 나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대로 주욱 좋은 시간이 이어지기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모든 것이 좋기만 한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갈수록 대기업 IT 회사가 갖는 경직성과 한계를 목도하게 됐으니. 2009년 말, 한국에 아이폰 3gs가 첫 출시되고 2010년대 초의 한국 IT 업계는 PC 중심의 온라인 서비스들이 스마트폰 기반으로 빠르게 전환되어 가는 대전환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던 이 대기업에서는 여전히 PC 중심 서비스나 피처폰 기반의 모바일 서비스를 놓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페이스북, 트위터 등 글로벌 SNS와 카카오톡, 왓츠앱 등 스마트폰 전용 메신저앱은 빠르게 시장을 점령해 갔고 PC 시대 SNS와 메신저의 국내 최강자였던 싸이월드와 네이트온을 운영하던 회사는 점점 메인 스트림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주력 서비스였던 포털, 메신저, SNS의 사용자수와 매출 지표만 봐도 회사가 위기를 맞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좀 버티다 보면 다시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희망을 붙잡기도 했지만, 수많은 동료들이 줄지어 이직을 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나에게도 서서히 ‘이직할 결심’이 선다.


#4. 국내 찐 IT 회사 L (2011 – 2017)

이직을 결심하면서 1순위로 가고 싶었던 회사는 ‘찐 IT 회사’였다. 한국에서 대기업이라는 간판을 떼고 IT 회사만을 놓고 봤을 때, 온라인 ‘플랫폼’이 그 기업의 핵심 비즈니스인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IT 회사가 1순위, 게임이라는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는 게임 회사가 2순위. 회사의 DNA 자체가 기술 중심적이고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이왕이면 업계에서 알아주는 그런 IT 회사들 말이다.

그렇게 무작정 몇몇 IT 회사에 지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하던 2011년 말, N 포털의 자회사이자 당시 무서운 속도로 서비스를 확장해가고 있던 L 사의 한 계열사로의 이직에 성공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회사를 가장 오래 다녔으며,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성장했고, 지나고 나서도 이 시절을 가장 그리워했으니, 어찌 보면 이곳에서 내 회사 생활의 전성기를 보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서비스가 잘됐다. 정말 잘됐다. 처음으로 내가 기획한 서비스가 시장에서 제대로 성공하는 단맛을 봤으니, 야근을 밥먹듯이 해도 신이 났다. 한 달에 한번 모바일앱 업데이트를 하는 사이클로, 매달 기획 > 디자인 > 개발 > QA > 업데이트 출시의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빠르게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듣고 이를 반영한 개선사항을 다음 업데이트에 반영할 수 있었고, 서비스가 잘 될수록 함께 앱을 함께 만들어가는 전체 팀워크도 단단해졌다. 동시에 서비스 성공에 따른 인센티브와 스톡옵션이라는 달콤한 열매 또한 주어졌으니 이때가 내 회사 생활의 리즈 시절이었음 부정할 수 없으리라.

더불어, 찐 IT 회사에서만 가능한 극강의 효율성도 경험했다. 100명이 조금 넘는 조직 중 열명 남짓의 기획 직군 대부분은 같은 식구인 N 포털이나 H 게임사, 혹은 다른 큰 게임 회사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고 경영진 역시 찐 IT 회사 실무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프로젝트 제안, 세부 기획, 디자인, 개발, 출시와 운영의 전 과정이 굉장히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이전 대기업에서 종종 만들어야 했던 ‘IT를 잘 모르는 경영진을 위한’ 별도의 추가 보고 자료, 일정한 폰트와 형식으로 한 바닥을 채워내야 하는 부서별 주간 보고 문서 같은 건 그 누구도 만들라 하지 않았으며, 의사 결정을 위한 핵심 정보들은 메일이나 위키에 요약되거나 실무를 위해 만들어진 기획서를 참고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IT 환경에서 더 빠르게 움직여 살아남기 위해 찐 IT 회사들이 본능적으로 취하게 된,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습성이리라.

이렇듯 대부분 장점만 기억나는 네 번째 회사와의 인연이 계속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남편의 싱가포르 발령을 계기로 가족이 싱가포르로 생활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아쉽게도 그 인연을 마무리하게 된다. 2017년 봄의 일이다.



2007년 겨울 처음 회사원이 된 이래로 2017년 봄 네 번째 회사를 떠나기까지, 돌아보면 새로운 회사를 선택할 때마다 나를 움직인 건 좀 더 성장하고 싶다는, 좀 더 성공하고 싶다는, 좀 더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중소 IT 회사에서 대기업 IT 계열사로 옮길 때는 ‘성장’과 ‘인정’, 즉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과 축적된 레퍼런스를 갖춘 환경에서 업무적으로 마음껏 ‘성장’하고 보다 안정된 연봉과 복지혜택을 받으며 사회에서 더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대기업 IT 계열사에서 찐 IT 회사로 옮길 때는 ‘성장’과 ‘인정’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내가 한 일을 시장에서 제대로 ‘성공’시키고픈 열망이 더해졌다.

회사 생활을 하며 성장, 성공, 인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회사 생활은 다양한 조직,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역학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어느 정도의 행운도 따라줘야 한다. 어느 순간 얼핏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처럼 보여도 업계의 흐름은 변하고 사업은 부침을 거듭해, 손에 쥔 모래알이 새어나가듯 내가 쥐고 있다고 믿었던 성공과 인정이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성장’은 그나마 유일하게 내 의지로 컨트롤되는 영역이다. 십 년간 네 곳의 회사를 거치며 깨달은 바다. 회사가 크던 작던, 시스템이 갖춰져 있던 아니던, 연봉이 많던 적던, 우리는 어디서나 성장할 수 있다. 어쩌면 성장은 성공과 인정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한 내 안의 힘을 기르는 훈련이 아닐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니, 지금 내가 성공과 인정에 목말라 있다면 오히려 성장에 더 몰두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성장할 수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기회를 보자.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해외 편)

#5. K 컨설팅펌 싱가포르 지사 (2019)

싱가포르로 이주한 후, 처음에는 아직 두 돌도 안된 아이를 키우는데 집중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부터는 화상영어, 유튜브, 영어학원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어실력 키우기에 몰두했다. 늦지 않게 다시 취업은 해야겠고 면접이라도 보려면 기본적인 영어는 해야 했다. 한국에서 IT 서비스 기획자로 쌓아온 10여 년의 경험을 또 다른 언어로 전환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일단 취업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다소 안일한 마음으로 싱가포르 내 여러 PM(Product Manager) 포지션에 무작정 이력서를 들이밀었다. ‘뭐 하나만 걸려라’의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러던 2018년 겨울, 드디어 한 글로벌 컨설팅펌 싱가포르 지사의 디지털 컨설팅 부서에 Manager 직급으로 잡 오퍼를 받았다.

나는 사내 인사부서와 협업하여 직원들을 위한 모바일 앱을 만드는 인하우스(In-house)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는데, 이 프로젝트의 고질적인 문제는 당시 유행하던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프로젝트가 실제 개발이나 출시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용자 조사, 핵심 기능 정의, 화면 시안 디자인 등의 과정을 반복해 왔던 데 있었다. 이들은 추진력을 갖고 프로젝트를 개발과 출시 단계까지 밀어붙여 줄 PM을 찾고 있었는데, 그래서 실제로 모바일앱을 만들고 글로벌 시장에 출시해 본 경험을 가진 나를 채용했다고 했다.

나는 안 되는 영어로 꾸역꾸역 사내 이런저런 팀을 만나며 첫 두 달을 보냈다. 사실 당시 내 영어실력은 간신히 영어인터뷰를 통과할 수 있는 딱 그 수준으로, 싱가포르, 인도, 미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의 다양한(?) 영어를 알아듣는 자체가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묘하게 100% 소통이 안 되는 듯한 영어 커뮤니케이션에 스트레스가 쌓여갈 즈음, 개발 가능성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던 프로젝트가 인사부서 새 담당자의 주장에 힘입어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하는 것으로 초기화되는 것을 겪으며, 나는 위태위태하게 버텨왔던 나 자신에게 백기를 내던졌다. 입사한 지 겨우 3개월 만이었다.

돌아보면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큰 패착이 있었다.

우선, 회사와 프로젝트의 성격에서 오는 모순. 이 회사는 컨설팅펌이었고 프로젝트의 목표는 실제로 앱을 개발, 출시, 운영하는 것이었다. 컨설팅 조직 특성상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두 번째는 내 영어 실력. 프로젝트 팀에서 나는 Manager 직급으로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 출신의 주니어 PM, UX/UI 디자이너, 개발자를 이끌어야 했는데 일단 더듬더듬 말하는 내 영어실력으로는 그들에게 내 경험을 충분히 설명하기도, 상급자로서 존중받기도 어려웠다. 거의 매일을 새벽 2-3시까지 다음날 있을 미팅이나 발표준비로 무리했지만, 외국인 팀원들에게 종종 ‘miscommunication’과 ‘misunderstanding’을 지적받았으니, 객관적으로도 당시 내 영어는 한참 부족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뻔뻔하게 버티면 버텼겠지만 받는 만큼 해내지도 못하고 민폐를 끼치고 있는, 처음 겪어보는 나 자신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해외취업을 한 지 3개월 만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다시 취준생 신분으로 돌아왔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며 ‘커뮤니케이션’ 역량만큼은 모두에게 인정받아왔었는데, 해외에서 취업한 첫 회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지적을 받다니. 언어가 바뀌니 회사원으로서 내가 가진 모든 무기가 리셋되어 버린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나는 서른 중반의 나이에 내 영어실력을 있는 그래도 인정하고, 신입의 마음으로 다시 해외취업에 도전한다.


#6. 싱가포르 SMB** 유통 스타트업 K (2019-2020)

싱가포르에서 취업한 첫 회사에서 3개월 만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가까스로 탈출한 후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곰곰이 다시 생각해 봤다. 다시 그럴듯한 IT 회사에 취업이 된다 한들 내가 잘 버틸 수 있을까? 냉정한 현실직시와 전략이 필요했다. 동시에 쪼그라든 자신감을 회복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회사는 돈 받은 만큼 일하는 곳이지 영어를 배우는 곳이 아니기에, 한국어로 하는 만큼 일할 자신이 없다면 한국에서 받던 만큼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정직한 생각도 했다. 언어 환경이 바뀐 걸 감안하지 않고, 한국에서부터 이어져 온 커리어를 막힘없이 이어 여기서도 반드시 ‘커리어 업’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금 내 상황에서는 어불성설 아닐까 싶어졌다. 성공과 인정에 대한 욕심은 잠시 내려놓고, ‘영어 성장’을 목표로, 회사에서 영어 환경에 노출되는 자체를 취업의 목표로 해보는 건 어떨까. 이것이 내가 내린 ‘전략적 후퇴’였다.

그렇게 나는 싱가포르의 한 유통 스타트업에 주 20시간 일하는 파트타임으로 취업했다. 지금은 이 회사도 규모가 꽤 커졌지만 당시에는 대표를 제외하고는 모든 직원이 싱가포리안인 직원 10명 남짓의 찐 SMB 스타트업이었다. 이 회사의 메인 비즈니스는 한국의 화장품이나 의류 등을 수입해 싱가포르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여기서 공급업체 관리, 수요예측 및 발주, 재고 및 물류관리, 싱가포르 현지 고객대응, 마케팅/계약 관련 번역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뭐든지 했다. 사실 IT가 아닌 업은 처음이었지만 기존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은 꽤 많았다. 하나의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본다면, 이전의 IT 프로젝트 관리 기법을 적용해 각각의 관리 포인트들을 매뉴얼화하거나 효율화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 공급업체와의 컨택이나 번역 등 회사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업무 영역도 있어서, 최소한 받은 만큼은 제대로 일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회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회사를 선택한 원래의 목적이었던, 영어 업무 환경에 노출되어 영어 실력을 늘리자는 목표는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었다. 날마다 회사에 출근해 직원들과 영어로 스몰톡을 하고 채팅을 하고 메일을 주고받고 미팅을 하고 회의록을 쓰면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회사에서 쓰는 실전영어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 홀로 하던 방구석 영어공부가 아닌, 실제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원어민 동료들의 생생한 영어 표현은 최고의 실전교재가 되어 주었다. 나는 서서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7. S 대기업 IT 계열사 해외 법인 (2020-2022)

영어로 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친 후에는 끊어졌던 커리어를 다시 이어가기 위한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몇몇 싱가포르 회사와 외국계 IT 회사의 문을 두드리다 몇 차례 최종 인터뷰까지 가기도 했지만, 결국 또 다른 국내 대기업 IT 회사 해외 법인의 제품 관리자(Product Manager)로 취업한다. 때는 2020년 3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미지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이 회사는 같은 그룹 내 계열사들을 주 고객사로 두고 그룹사들의 각종 비즈니스 시스템의 개발과 운영을 서비스하는 SI 회사였는데, 나는 여기서 고객사 비즈니스 시스템 담당 PM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이전 한국의 IT 회사에서 일할 때와 다른 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먼저 영어와 한국어를 7:3 정도의 비중으로 사용해야 했다. 실제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현업의 로컬 직원들과는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고, 한국 본사에서 온 주재원이나 고객사의 한국인 파트너와는 한국어로 소통하는 식이었다. 다양한 상황, 다양한 이해 관계자 사이에서 유연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이 저절로 생겨났다.

두 번째는 ‘고객’의 존재다. 이전에는 사용자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빠르게 제품을 업데이트해 시장에서 성공시키는 B2C 형태였다면, 이제는 B2B 고객의 사업을 이해하고 사업 현장의 어려움과 니즈를 파악하여 고객의 사업운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개선해나가야 했다. 고객은 IT 전문가가 아니기에, IT 회사에서 상사에게 보고하듯이 이슈와 현안을 보고해서는 안 됐다. 나는 빠르게 달라진 업무 환경에 적응해 갔다.

세 번째로는 ‘근무 형태’다. 2020년 당시 재난과도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나는 입사 둘째 날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결국 이 회사에서 일한 대부분의 시간을 재택근무 형태로 일했다. 모두가 처음 해보는 재택근무다 보니 자연스레 업무 속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느린 속도가 ‘IT 회사에서 영어로 일 잘하기’를 목표로 했던 나에게 충분히 적응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됐다.

그렇게 이 회사에서 2년 반 정도를 성실히 일했고, 나는 완전히 부활했다. 성장, 성공, 인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열망에 견주어보더라도 나는 다시 내 본업인 IT 업계로 돌아와 ‘성장’했고 ‘인정’ 받았다. 시장에서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고 의미 있는 매출을 지속적으로 끌어내는 B2C 제품의 전통적인 ‘성공’과는 달랐지만, 고객의 비즈니스에 의미 있게 활용되는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운영했다는 면에서, 아쉽긴 해도 어느 정도의 ‘성공’도 이뤄냈다.


#8. S 대기업 전자회사 해외 법인 (2022-2025)

일곱 번의 이직을 겪으며 때로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이직을 도모했고 때로는 주변에서 자연스레 상황이 만들어졌는데, 이 일곱 번째 이직의 경우는 후자였다. 고객사 파트너로부터 고객사로의 이직 제안을 받은 것이다. 고객사는 같은 S 그룹의 전자회사였는데, 해당 전자회사의 혁신부서에서 다양한 업무 프로세스 개선과 비즈니스 시스템 관련 혁신 프로젝트들을 담당하는 Business Project Manager 역할로 오퍼를 받았다. IT 회사가 아닌 다른 업계로 옮긴다는 면에서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연봉과 인센티브 등 처우가 꽤 업그레이드되었기에 결국 이직을 결정했다.

과거에 내가 한 결정에 대해 되도록 후회하지 않고 그래도 그 안에서 일말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일곱 번째 이직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높은 확률로 회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여덟 번째 회사에서 나는 빠르게 소진되어 갔다.

우선 한국 대기업의 해외 법인이다 보니 본사 주재원의 파워가 막강했다. 직속 임원이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마다 바뀌고 각 부서의 주재원들은 4년마다 바뀌는데, 새로운 임원이 올 때마다 조직 구조, 보고 방식, 프로젝트, 담당 업무를 비롯해 회식 스타일과 앉는 자리 등 모든 게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본사 직원과 현지 직원들 간의 승진과 보상 체계가 아예 달랐기도 했지만, 내가 속한 부서의 주재원의 입지와 그의 의지에 따라 현지 직원들의 승진과 보상의 결과도 달라졌다. 싱가포리안 현지 직원들조차도 회사에 세 개의 계급 – 본사 주재원, 현지 채용 싱가포리안, 현지 채용 한국인 – 이 존재한다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는데, 나는 현지 채용 한국인으로서 육두품의 맨 밑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듯한 처지에 갈수록 자괴감이 들었다. 그것도 해외에서. 그것도 한국 회사에서.

또한 나는 본사의 ERP, SCM 시스템과 연계된 각종 현지 시스템 – 판매영업 지원시스템 – 들을 담당했는데, 전자회사의 해외 판매법인으로서 영업과 판매가 회사의 핵심기능이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이 이 회사의 핵심 비즈니스가 아닌 데서 오는 갈증과 그로 인한 내 포지션에 대한 불안감도 점점 커져 갔다. 회사는 꽤 자주, 특히 직속 임원이 바뀔 때마다 나와 같은 지원부서의 조직구성을 변경하거나 인력을 재배치했는데, 입사한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에는 하루아침에 재무부서로 발령이 난 적도 있고, 2년 반쯤 지났을 때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내 소속법인을 동남아 지역 총괄에서 싱가포르 법인으로 바꿔버리는 회사의 결정에,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기도 했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고 장단이 있듯이, 이 회사에서 얻은 것도 있다. 매일매일 영어로, 한글로 온갖 종류의 보고서를 쓰다 보니 보고서 스킬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잘 요약된 한 장 분량의 워드 보고서와 깔끔하게 정제된 PPT를 만드는 스킬만큼은 모두에게 두루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간 IT 회사에서는 알지 못했던 전자 업계의 영업, 유통, 판매 현장에 대한 이해와 각종 비즈니스 시스템에 대한 경험치도 높아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어느 순간부터 이 회사에서의 내 미래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그간 IT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나에게, 이 전자 회사, 특히 IT 직무에 대한 수요나 이해도가 너무도 열악한 이 해외법인에서 더 이상의 비전을 찾기는 어려웠다. 고심이 깊어갈 즈음인 2025년 봄, 나는 싱가포르 영주권을 받아 더 이상 취업 비자가 필요 없게 되자 이참에 과감히 회사생활을 쉬어가기로 결심하고 이 회사를 그만둔다. 그게 몇 달 전인 2025년 여름이었다.



돌아보면, 싱가포르에서의 회사 생활은 한국에서 만큼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이 상대적으로 더 오래전이고 더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추억 보정 효과가 작용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순탄하다’가 가진 사전적 의미대로 해외에서의 회사 생활은 ‘그 길이 험하지 않고 평탄’ 하지 못했다. 언어의 제약 때문이었을까, 해외라는 낯선 환경 때문이었을까. 분명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마치 손목, 발목에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래주머니를 서너 개씩 차고 있는 것 같이 내 몸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 무거워진 몸으로 예전과 같은 배에 타서 예전과 같은 속도로 항해를 하려다가는 자칫 배가 가라앉을 수 있다는 걸 직접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며 깨닫는 과정이었다.

옛 말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라’라는 말이 있다. 이왕이면 성장, 성공, 인정의 세 마리 토끼를 계속해서 다 잡고 싶었기에 해외에 와서도 어디라도 누울 자리만 있으면 일단 뻔뻔하게 드러누웠으나, 이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누울 자리 ‘보기’를 게을리했음을 통렬히 반성한다. 다른 나라에서 영어를 써야 하는 환경 탓에 한국에 비해 여러모로 선택지가 줄어든 건 맞지만,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좀 더 면밀히 그 회사에 대해 알아보고 그 회사에서의 내 미래를 그려봤으면 어땠을까. 나 홀로 땅을 파고 굴을 파고 지하실까지 파는 삽질의 경험도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기에 지난 몇몇 회사 선택이 100% 실패였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누울 자리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누웠다가 온몸이 너덜너덜 쑤시고 결리는 지금, 나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이곳에 다시 내가 누울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각주>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 사용자 중심의 창의적 문제 해결 접근법으로, 고객의 요구와 경험을 깊이 이해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 ‘공감(Empathise) – 문제 정의(Define) – 아이디어 도출(Ideate) – 시제품 제작(Prototype) – 테스트(Test)’의 다섯 단계를 반복적으로 수행할 것을 제시한다.

**SMB(Small & Medium Business): 중소규모 사업. 보통 규모가 작은 기업을 뜻하며, 1인 기업부터 스타트업, 중소기업까지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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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편)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집에서 해라.”

이 말은 인터넷에 떠도는 격언(?)으로, 회사 생활은 기본적으로 머슴살이와 다를 바 없다는 자조이자 이왕 회사 생활을 할 거면 떨어질 콩고물이 상대적으로 많은, 처우가 좋은 대(大) 기업에서 회사 생활을 하라는 당부를 담은 말이다.

그간 두 개 나라 여덟 개 회사에서 다양한 머슴살이를 해온 나로서도 이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100% 동의할 수만은 없다. 대감집(대기업)과 여느 양반집(중소기업)을 오간 일곱 번의 이직 과정에서 그때그때마다 나에게 필요한 선택을 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왕 지난 회사 생활을 돌아보는 큰 회고를 하기로 했으니 하나하나 떠올려 보자. 왜 그 회사를 선택했고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이 아쉬웠고 무엇 때문에 떠나기로 했는지. 그 속에서 누군가는 회사 선택의 기준에 대한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1. 국내 중소 IT 회사 B 게임즈 (2007 – 2009)

지금은 사명이 바뀌었지만 당시 사명은 B 게임즈로, 영화 및 게임을 제작하는 국내 중소기업이었다. 나는 앞서 언급한 메타버스 서비스인 ‘세컨드 라이프’의 국내 현지화 프로젝트 팀에서 약 일 년 반동안 서비스 기획자로 일했는데, 내가 맡은 프로젝트가 이 회사의 주력 아이템인 영화나 게임이 아니었기에 갓 신설된 프로젝트 팀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 실적 압박 없이 – 일할 수 있었다.

팀원은 팀장 포함 7명 정도로, 멤버 대부분이 주니어인 팀이었다. 메타버스라는 전례가 없던 서비스를 다뤄야 하다 보니 이 분야에 경험 있는 사람 자체가 없어서 모두가 맨 땅에 헤딩을 하며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가야 했다. 때문에 나는 입사 첫날부터 메인 기획자가 되어 근본도 없이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IT 회사의 서비스 기획자가 기획서를 어떻게 써야 하고 프로젝트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참고할 레퍼런스가 없었기에 이 시기의 나는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진심 전력을 다해 일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왜 만들려고 하는지, 그것을 기획서에 어떻게 담고 팀원들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일이 잘 굴러갈 것인지 등, 각 과업의 목적을 0에서부터 정의하며 본능적으로 일했다. 돌아보면 이때가 가장 원초적인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하며 일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긍정적인 기억을 뒤집어 말하면, 보고 배울 게 그리 많지 않은 환경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좀 더 규모가 큰 다른 회사들을 겪다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야생에서 살아남았다고.


#2. #3. 국내 S 대기업 IT 계열사 (2009-2011)

첫 번째 회사에서 맡은 메타버스 프로젝트의 성과가 지지부진해 프로젝트 팀의 미래도 내 커리어도 막막해질 즈음, 한 대기업 IT 계열사에서 인터뷰 제안을 받았다. 메타버스 프로젝트 경험이 있는 사원급 서비스 기획자를 채용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당시 IT 업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좁았고, 국내에서 메타버스 경험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가능했던 일일 테다.

지나 보니 회사 규모가 작더라도 유니크한 프로젝트를 해봤던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남다른 한 줄의 유니크함이 또 다른 커리어 확장과 연결될 수도 있으니. 그렇게 나는 두 번째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고, 일 년 뒤 내가 속했던 메타버스 관련 사내 CIC(Company-In-Company) 조직의 해체로 같은 S 대기업 내의 또 다른 IT 계열사로 이동해 세 번째 회사와 만나게 된다.

이 두 대기업 IT 계열사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회사는 개개인의 기량이 아닌 시스템으로 굴러간다’는 것과 앞의 말과 얼핏 모순되어 보이지만 ‘세상에 날고 기는 사람은 많고 보고 배울 실력자는 도처에 널려 있구나’였다. 한마디로, 회사의 시스템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배울 게 많았다. 어찌 보면 체계화된 시스템 속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도 상향 평준화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당시 나는 사원에서 대리로 진급해 한참 일을 배워가고 성장하는 시기였다. 체계적인 업무 프로세스(기획 > 디자인 > 개발 > QA > 론칭 > 운영)와 경험 많은 선배들과 능력 있는 동료들과 주고받은 이메일, 문서, 대화, 미팅, 의사 결정 등의 레퍼런스를 재료로, 이후로도 내 업무능력의 바탕이 되어 준 기본기를 갈고닦을 수 있었다. 대기업이었던 만큼 연봉이나 복지도 첫 회사에 비해 나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대로 주욱 좋은 시간이 이어지기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모든 것이 좋기만 한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갈수록 대기업 IT 회사가 갖는 경직성과 한계를 목도하게 됐으니. 2009년 말, 한국에 아이폰 3gs가 첫 출시되고 2010년대 초의 한국 IT 업계는 PC 중심의 온라인 서비스들이 스마트폰 기반으로 빠르게 전환되어 가는 대전환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던 이 대기업에서는 여전히 PC 중심 서비스나 피처폰 기반의 모바일 서비스를 놓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페이스북, 트위터 등 글로벌 SNS와 카카오톡, 왓츠앱 등 스마트폰 전용 메신저앱은 빠르게 시장을 점령해 갔고 PC 시대 SNS와 메신저의 국내 최강자였던 싸이월드와 네이트온을 운영하던 회사는 점점 메인 스트림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주력 서비스였던 포털, 메신저, SNS의 사용자수와 매출 지표만 봐도 회사가 위기를 맞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좀 버티다 보면 다시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희망을 붙잡기도 했지만, 수많은 동료들이 줄지어 이직을 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나에게도 서서히 ‘이직할 결심’이 선다.


#4. 국내 찐 IT 회사 L (2011 – 2017)

이직을 결심하면서 1순위로 가고 싶었던 회사는 ‘찐 IT 회사’였다. 한국에서 대기업이라는 간판을 떼고 IT 회사만을 놓고 봤을 때, 온라인 ‘플랫폼’이 그 기업의 핵심 비즈니스인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IT 회사가 1순위, 게임이라는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는 게임 회사가 2순위. 회사의 DNA 자체가 기술 중심적이고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이왕이면 업계에서 알아주는 그런 IT 회사들 말이다.

그렇게 무작정 몇몇 IT 회사에 지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하던 2011년 말, N 포털의 자회사이자 당시 무서운 속도로 서비스를 확장해가고 있던 L 사의 한 계열사로의 이직에 성공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회사를 가장 오래 다녔으며,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성장했고, 지나고 나서도 이 시절을 가장 그리워했으니, 어찌 보면 이곳에서 내 회사 생활의 전성기를 보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서비스가 잘됐다. 정말 잘됐다. 처음으로 내가 기획한 서비스가 시장에서 제대로 성공하는 단맛을 봤으니, 야근을 밥먹듯이 해도 신이 났다. 한 달에 한번 모바일앱 업데이트를 하는 사이클로, 매달 기획 > 디자인 > 개발 > QA > 업데이트 출시의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빠르게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듣고 이를 반영한 개선사항을 다음 업데이트에 반영할 수 있었고, 서비스가 잘 될수록 함께 앱을 함께 만들어가는 전체 팀워크도 단단해졌다. 동시에 서비스 성공에 따른 인센티브와 스톡옵션이라는 달콤한 열매 또한 주어졌으니 이때가 내 회사 생활의 리즈 시절이었음 부정할 수 없으리라.

더불어, 찐 IT 회사에서만 가능한 극강의 효율성도 경험했다. 100명이 조금 넘는 조직 중 열명 남짓의 기획 직군 대부분은 같은 식구인 N 포털이나 H 게임사, 혹은 다른 큰 게임 회사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고 경영진 역시 찐 IT 회사 실무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프로젝트 제안, 세부 기획, 디자인, 개발, 출시와 운영의 전 과정이 굉장히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이전 대기업에서 종종 만들어야 했던 ‘IT를 잘 모르는 경영진을 위한’ 별도의 추가 보고 자료, 일정한 폰트와 형식으로 한 바닥을 채워내야 하는 부서별 주간 보고 문서 같은 건 그 누구도 만들라 하지 않았으며, 의사 결정을 위한 핵심 정보들은 메일이나 위키에 요약되거나 실무를 위해 만들어진 기획서를 참고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IT 환경에서 더 빠르게 움직여 살아남기 위해 찐 IT 회사들이 본능적으로 취하게 된,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습성이리라.

이렇듯 대부분 장점만 기억나는 네 번째 회사와의 인연이 계속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남편의 싱가포르 발령을 계기로 가족이 싱가포르로 생활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아쉽게도 그 인연을 마무리하게 된다. 2017년 봄의 일이다.



2007년 겨울 처음 회사원이 된 이래로 2017년 봄 네 번째 회사를 떠나기까지, 돌아보면 새로운 회사를 선택할 때마다 나를 움직인 건 좀 더 성장하고 싶다는, 좀 더 성공하고 싶다는, 좀 더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중소 IT 회사에서 대기업 IT 계열사로 옮길 때는 ‘성장’과 ‘인정’, 즉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과 축적된 레퍼런스를 갖춘 환경에서 업무적으로 마음껏 ‘성장’하고 보다 안정된 연봉과 복지혜택을 받으며 사회에서 더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대기업 IT 계열사에서 찐 IT 회사로 옮길 때는 ‘성장’과 ‘인정’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내가 한 일을 시장에서 제대로 ‘성공’시키고픈 열망이 더해졌다.

회사 생활을 하며 성장, 성공, 인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회사 생활은 다양한 조직,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역학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어느 정도의 행운도 따라줘야 한다. 어느 순간 얼핏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처럼 보여도 업계의 흐름은 변하고 사업은 부침을 거듭해, 손에 쥔 모래알이 새어나가듯 내가 쥐고 있다고 믿었던 성공과 인정이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성장’은 그나마 유일하게 내 의지로 컨트롤되는 영역이다. 십 년간 네 곳의 회사를 거치며 깨달은 바다. 회사가 크던 작던, 시스템이 갖춰져 있던 아니던, 연봉이 많던 적던, 우리는 어디서나 성장할 수 있다. 어쩌면 성장은 성공과 인정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한 내 안의 힘을 기르는 훈련이 아닐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니, 지금 내가 성공과 인정에 목말라 있다면 오히려 성장에 더 몰두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성장할 수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기회를 보자.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해외 편)

#5. K 컨설팅펌 싱가포르 지사 (2019)

싱가포르로 이주한 후, 처음에는 아직 두 돌도 안된 아이를 키우는데 집중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부터는 화상영어, 유튜브, 영어학원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어실력 키우기에 몰두했다. 늦지 않게 다시 취업은 해야겠고 면접이라도 보려면 기본적인 영어는 해야 했다. 한국에서 IT 서비스 기획자로 쌓아온 10여 년의 경험을 또 다른 언어로 전환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일단 취업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다소 안일한 마음으로 싱가포르 내 여러 PM(Product Manager) 포지션에 무작정 이력서를 들이밀었다. ‘뭐 하나만 걸려라’의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러던 2018년 겨울, 드디어 한 글로벌 컨설팅펌 싱가포르 지사의 디지털 컨설팅 부서에 Manager 직급으로 잡 오퍼를 받았다.

나는 사내 인사부서와 협업하여 직원들을 위한 모바일 앱을 만드는 인하우스(In-house)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는데, 이 프로젝트의 고질적인 문제는 당시 유행하던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프로젝트가 실제 개발이나 출시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용자 조사, 핵심 기능 정의, 화면 시안 디자인 등의 과정을 반복해 왔던 데 있었다. 이들은 추진력을 갖고 프로젝트를 개발과 출시 단계까지 밀어붙여 줄 PM을 찾고 있었는데, 그래서 실제로 모바일앱을 만들고 글로벌 시장에 출시해 본 경험을 가진 나를 채용했다고 했다.

나는 안 되는 영어로 꾸역꾸역 사내 이런저런 팀을 만나며 첫 두 달을 보냈다. 사실 당시 내 영어실력은 간신히 영어인터뷰를 통과할 수 있는 딱 그 수준으로, 싱가포르, 인도, 미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의 다양한(?) 영어를 알아듣는 자체가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묘하게 100% 소통이 안 되는 듯한 영어 커뮤니케이션에 스트레스가 쌓여갈 즈음, 개발 가능성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던 프로젝트가 인사부서 새 담당자의 주장에 힘입어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하는 것으로 초기화되는 것을 겪으며, 나는 위태위태하게 버텨왔던 나 자신에게 백기를 내던졌다. 입사한 지 겨우 3개월 만이었다.

돌아보면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큰 패착이 있었다.

우선, 회사와 프로젝트의 성격에서 오는 모순. 이 회사는 컨설팅펌이었고 프로젝트의 목표는 실제로 앱을 개발, 출시, 운영하는 것이었다. 컨설팅 조직 특성상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두 번째는 내 영어 실력. 프로젝트 팀에서 나는 Manager 직급으로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 출신의 주니어 PM, UX/UI 디자이너, 개발자를 이끌어야 했는데 일단 더듬더듬 말하는 내 영어실력으로는 그들에게 내 경험을 충분히 설명하기도, 상급자로서 존중받기도 어려웠다. 거의 매일을 새벽 2-3시까지 다음날 있을 미팅이나 발표준비로 무리했지만, 외국인 팀원들에게 종종 ‘miscommunication’과 ‘misunderstanding’을 지적받았으니, 객관적으로도 당시 내 영어는 한참 부족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뻔뻔하게 버티면 버텼겠지만 받는 만큼 해내지도 못하고 민폐를 끼치고 있는, 처음 겪어보는 나 자신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해외취업을 한 지 3개월 만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다시 취준생 신분으로 돌아왔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며 ‘커뮤니케이션’ 역량만큼은 모두에게 인정받아왔었는데, 해외에서 취업한 첫 회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지적을 받다니. 언어가 바뀌니 회사원으로서 내가 가진 모든 무기가 리셋되어 버린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나는 서른 중반의 나이에 내 영어실력을 있는 그래도 인정하고, 신입의 마음으로 다시 해외취업에 도전한다.


#6. 싱가포르 SMB** 유통 스타트업 K (2019-2020)

싱가포르에서 취업한 첫 회사에서 3개월 만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가까스로 탈출한 후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곰곰이 다시 생각해 봤다. 다시 그럴듯한 IT 회사에 취업이 된다 한들 내가 잘 버틸 수 있을까? 냉정한 현실직시와 전략이 필요했다. 동시에 쪼그라든 자신감을 회복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회사는 돈 받은 만큼 일하는 곳이지 영어를 배우는 곳이 아니기에, 한국어로 하는 만큼 일할 자신이 없다면 한국에서 받던 만큼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정직한 생각도 했다. 언어 환경이 바뀐 걸 감안하지 않고, 한국에서부터 이어져 온 커리어를 막힘없이 이어 여기서도 반드시 ‘커리어 업’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금 내 상황에서는 어불성설 아닐까 싶어졌다. 성공과 인정에 대한 욕심은 잠시 내려놓고, ‘영어 성장’을 목표로, 회사에서 영어 환경에 노출되는 자체를 취업의 목표로 해보는 건 어떨까. 이것이 내가 내린 ‘전략적 후퇴’였다.

그렇게 나는 싱가포르의 한 유통 스타트업에 주 20시간 일하는 파트타임으로 취업했다. 지금은 이 회사도 규모가 꽤 커졌지만 당시에는 대표를 제외하고는 모든 직원이 싱가포리안인 직원 10명 남짓의 찐 SMB 스타트업이었다. 이 회사의 메인 비즈니스는 한국의 화장품이나 의류 등을 수입해 싱가포르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여기서 공급업체 관리, 수요예측 및 발주, 재고 및 물류관리, 싱가포르 현지 고객대응, 마케팅/계약 관련 번역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뭐든지 했다. 사실 IT가 아닌 업은 처음이었지만 기존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은 꽤 많았다. 하나의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본다면, 이전의 IT 프로젝트 관리 기법을 적용해 각각의 관리 포인트들을 매뉴얼화하거나 효율화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 공급업체와의 컨택이나 번역 등 회사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업무 영역도 있어서, 최소한 받은 만큼은 제대로 일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회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회사를 선택한 원래의 목적이었던, 영어 업무 환경에 노출되어 영어 실력을 늘리자는 목표는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었다. 날마다 회사에 출근해 직원들과 영어로 스몰톡을 하고 채팅을 하고 메일을 주고받고 미팅을 하고 회의록을 쓰면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회사에서 쓰는 실전영어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 홀로 하던 방구석 영어공부가 아닌, 실제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원어민 동료들의 생생한 영어 표현은 최고의 실전교재가 되어 주었다. 나는 서서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7. S 대기업 IT 계열사 해외 법인 (2020-2022)

영어로 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친 후에는 끊어졌던 커리어를 다시 이어가기 위한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몇몇 싱가포르 회사와 외국계 IT 회사의 문을 두드리다 몇 차례 최종 인터뷰까지 가기도 했지만, 결국 또 다른 국내 대기업 IT 회사 해외 법인의 제품 관리자(Product Manager)로 취업한다. 때는 2020년 3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미지의 바이러스가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이 회사는 같은 그룹 내 계열사들을 주 고객사로 두고 그룹사들의 각종 비즈니스 시스템의 개발과 운영을 서비스하는 SI 회사였는데, 나는 여기서 고객사 비즈니스 시스템 담당 PM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이전 한국의 IT 회사에서 일할 때와 다른 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먼저 영어와 한국어를 7:3 정도의 비중으로 사용해야 했다. 실제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현업의 로컬 직원들과는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고, 한국 본사에서 온 주재원이나 고객사의 한국인 파트너와는 한국어로 소통하는 식이었다. 다양한 상황, 다양한 이해 관계자 사이에서 유연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이 저절로 생겨났다.

두 번째는 ‘고객’의 존재다. 이전에는 사용자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빠르게 제품을 업데이트해 시장에서 성공시키는 B2C 형태였다면, 이제는 B2B 고객의 사업을 이해하고 사업 현장의 어려움과 니즈를 파악하여 고객의 사업운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개선해나가야 했다. 고객은 IT 전문가가 아니기에, IT 회사에서 상사에게 보고하듯이 이슈와 현안을 보고해서는 안 됐다. 나는 빠르게 달라진 업무 환경에 적응해 갔다.

세 번째로는 ‘근무 형태’다. 2020년 당시 재난과도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나는 입사 둘째 날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결국 이 회사에서 일한 대부분의 시간을 재택근무 형태로 일했다. 모두가 처음 해보는 재택근무다 보니 자연스레 업무 속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느린 속도가 ‘IT 회사에서 영어로 일 잘하기’를 목표로 했던 나에게 충분히 적응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됐다.

그렇게 이 회사에서 2년 반 정도를 성실히 일했고, 나는 완전히 부활했다. 성장, 성공, 인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열망에 견주어보더라도 나는 다시 내 본업인 IT 업계로 돌아와 ‘성장’했고 ‘인정’ 받았다. 시장에서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고 의미 있는 매출을 지속적으로 끌어내는 B2C 제품의 전통적인 ‘성공’과는 달랐지만, 고객의 비즈니스에 의미 있게 활용되는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운영했다는 면에서, 아쉽긴 해도 어느 정도의 ‘성공’도 이뤄냈다.


#8. S 대기업 전자회사 해외 법인 (2022-2025)

일곱 번의 이직을 겪으며 때로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이직을 도모했고 때로는 주변에서 자연스레 상황이 만들어졌는데, 이 일곱 번째 이직의 경우는 후자였다. 고객사 파트너로부터 고객사로의 이직 제안을 받은 것이다. 고객사는 같은 S 그룹의 전자회사였는데, 해당 전자회사의 혁신부서에서 다양한 업무 프로세스 개선과 비즈니스 시스템 관련 혁신 프로젝트들을 담당하는 Business Project Manager 역할로 오퍼를 받았다. IT 회사가 아닌 다른 업계로 옮긴다는 면에서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연봉과 인센티브 등 처우가 꽤 업그레이드되었기에 결국 이직을 결정했다.

과거에 내가 한 결정에 대해 되도록 후회하지 않고 그래도 그 안에서 일말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일곱 번째 이직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높은 확률로 회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여덟 번째 회사에서 나는 빠르게 소진되어 갔다.

우선 한국 대기업의 해외 법인이다 보니 본사 주재원의 파워가 막강했다. 직속 임원이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마다 바뀌고 각 부서의 주재원들은 4년마다 바뀌는데, 새로운 임원이 올 때마다 조직 구조, 보고 방식, 프로젝트, 담당 업무를 비롯해 회식 스타일과 앉는 자리 등 모든 게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본사 직원과 현지 직원들 간의 승진과 보상 체계가 아예 달랐기도 했지만, 내가 속한 부서의 주재원의 입지와 그의 의지에 따라 현지 직원들의 승진과 보상의 결과도 달라졌다. 싱가포리안 현지 직원들조차도 회사에 세 개의 계급 – 본사 주재원, 현지 채용 싱가포리안, 현지 채용 한국인 – 이 존재한다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는데, 나는 현지 채용 한국인으로서 육두품의 맨 밑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듯한 처지에 갈수록 자괴감이 들었다. 그것도 해외에서. 그것도 한국 회사에서.

또한 나는 본사의 ERP, SCM 시스템과 연계된 각종 현지 시스템 – 판매영업 지원시스템 – 들을 담당했는데, 전자회사의 해외 판매법인으로서 영업과 판매가 회사의 핵심기능이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이 이 회사의 핵심 비즈니스가 아닌 데서 오는 갈증과 그로 인한 내 포지션에 대한 불안감도 점점 커져 갔다. 회사는 꽤 자주, 특히 직속 임원이 바뀔 때마다 나와 같은 지원부서의 조직구성을 변경하거나 인력을 재배치했는데, 입사한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에는 하루아침에 재무부서로 발령이 난 적도 있고, 2년 반쯤 지났을 때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내 소속법인을 동남아 지역 총괄에서 싱가포르 법인으로 바꿔버리는 회사의 결정에,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기도 했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고 장단이 있듯이, 이 회사에서 얻은 것도 있다. 매일매일 영어로, 한글로 온갖 종류의 보고서를 쓰다 보니 보고서 스킬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잘 요약된 한 장 분량의 워드 보고서와 깔끔하게 정제된 PPT를 만드는 스킬만큼은 모두에게 두루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간 IT 회사에서는 알지 못했던 전자 업계의 영업, 유통, 판매 현장에 대한 이해와 각종 비즈니스 시스템에 대한 경험치도 높아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어느 순간부터 이 회사에서의 내 미래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그간 IT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나에게, 이 전자 회사, 특히 IT 직무에 대한 수요나 이해도가 너무도 열악한 이 해외법인에서 더 이상의 비전을 찾기는 어려웠다. 고심이 깊어갈 즈음인 2025년 봄, 나는 싱가포르 영주권을 받아 더 이상 취업 비자가 필요 없게 되자 이참에 과감히 회사생활을 쉬어가기로 결심하고 이 회사를 그만둔다. 그게 몇 달 전인 2025년 여름이었다.



돌아보면, 싱가포르에서의 회사 생활은 한국에서 만큼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이 상대적으로 더 오래전이고 더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추억 보정 효과가 작용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순탄하다’가 가진 사전적 의미대로 해외에서의 회사 생활은 ‘그 길이 험하지 않고 평탄’ 하지 못했다. 언어의 제약 때문이었을까, 해외라는 낯선 환경 때문이었을까. 분명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마치 손목, 발목에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래주머니를 서너 개씩 차고 있는 것 같이 내 몸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 무거워진 몸으로 예전과 같은 배에 타서 예전과 같은 속도로 항해를 하려다가는 자칫 배가 가라앉을 수 있다는 걸 직접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며 깨닫는 과정이었다.

옛 말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라’라는 말이 있다. 이왕이면 성장, 성공, 인정의 세 마리 토끼를 계속해서 다 잡고 싶었기에 해외에 와서도 어디라도 누울 자리만 있으면 일단 뻔뻔하게 드러누웠으나, 이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누울 자리 ‘보기’를 게을리했음을 통렬히 반성한다. 다른 나라에서 영어를 써야 하는 환경 탓에 한국에 비해 여러모로 선택지가 줄어든 건 맞지만,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좀 더 면밀히 그 회사에 대해 알아보고 그 회사에서의 내 미래를 그려봤으면 어땠을까. 나 홀로 땅을 파고 굴을 파고 지하실까지 파는 삽질의 경험도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기에 지난 몇몇 회사 선택이 100% 실패였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누울 자리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누웠다가 온몸이 너덜너덜 쑤시고 결리는 지금, 나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이곳에 다시 내가 누울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각주>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 사용자 중심의 창의적 문제 해결 접근법으로, 고객의 요구와 경험을 깊이 이해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 ‘공감(Empathise) – 문제 정의(Define) – 아이디어 도출(Ideate) – 시제품 제작(Prototype) – 테스트(Test)’의 다섯 단계를 반복적으로 수행할 것을 제시한다.

**SMB(Small & Medium Business): 중소규모 사업. 보통 규모가 작은 기업을 뜻하며, 1인 기업부터 스타트업, 중소기업까지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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