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장님의 발령 소식
한 달, 두 달… 신입사원으로 매장에 온 지 6개월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정신없었지만, 그만큼 매장 안팎의 다양한 사람들과 매일 소통하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 내 인생의 여백을 소중한 경험들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매장 점장들은 지역별로 돌며 권역의 여러 매장을 경험한다.
어느 날, 점장님이 갑자기 발령 예정이라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기분이 좋아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엄하게 가르침을 받아 미울 때도 있었지만 막상 가신다니 섭섭했다.
“OO야~ 내 발령 이야기 들었지? 나 간다~!”
“네… 점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OO는 나중에 나를 또 만날 수도 있겠네~?”
“네?”
“응. 나 너 사는 지역 매장으로 발령 나니까, 나중에 너도 여기 올 수 있어.”
(섭섭한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다, 하하.)
그렇게 이전 점장님이 떠나고, 새 점장님이 오셨다.
새로운 리더의 등장
K**치킨 할아버지를 닮은 외모, 중후한 목소리, 묘한 포스.
알고 보니 백화점 과일·가공 MD 경력이 어마어마한 분이었다.
첫 아침 조회에서 직원들과 인사를 마치고 딱 한마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원래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나중에 보고 말씀드릴게요.”
모두 평소처럼 매장 업무를 했고, 일주일 뒤 월요일에 처음으로 입을 여셨다.
“일주일간 여러분이 하는 일 구석구석 잘 보았고요, 전반적으로 개선할 점이 있습니다. 오늘부터 돌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곧 대대적인 체인지였다.
매장 *POP 광고 방법부터 디자인, 매대 연출, 여사원별 출근 시간 체크, 제품 진열 변경, 담당별 체크리스트·과제까지—정말 어마어마했다.
(*POP : 고객이 구매를 결정하는 공간/진열대 근처의 모든 시각 광고물)
칭찬과 신뢰의 힘
정말 너무 힘들었다.
기본 일 외에 추가로 나열된 일이 끝도 없었다. ‘이게 맞나…’ 싶었지만 부딪혔다. 배움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점장님이 조용히 옆에 앉아 말씀하셨다.
“OO 담당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되게 잘하네?”
“네? 제가요? 시킨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아직 입사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내가 시킨 과제라든지 오후 방송, 과일 발주 센스, 재고 금액 맞추는 것도 오차가 거의 없고… 혹시나 해서 창고를 가 봤더니 웬만큼 거짓이 아닌 실사로 다 맞춰놨더라고. 일을 하다 온 거야?”
“아뇨, 졸업하고 첫 회사인데요…”
“그래? 근데 일을 이렇게 잘해? 여기서 일하다가 어디 가고 싶어?”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진짜 열심히 해봐. 본사 슈퍼바이저로 보내줄 테니까.”
“좋은 건가요?”
“아니, OO 담당은 뭐 이렇게 아는 게 없어, 하하하.”
순간 당황스러웠다. 칭찬인지, 놀림인지 헷갈렸다. ‘본사 슈퍼바이저’라는 말도 생소했다.
동기들과 교육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보통은 순환근무로 빠지지만 본사 슈퍼바이저는 업무를 잘하는 직원만 갈 수 있는 자리라고 했다. 그때 생각했다.
‘와, 나도 가야지. 열심히 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칭찬과 신뢰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도록 열심히 하게 만드는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아침 조회에서 “OO 담당처럼 해보세요”, “OO 담당 실적이 제일 좋네요”라는 칭찬은 사실 매일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과일 담당이 이렇게까지 주목받을 수 있구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 적을 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또한 기회라 믿고, 다른 담당과 다른 코너의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도우며 함께하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시기와 질투가 뒤섞였지만, 점장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칭찬하고 피드백을 주자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여사원들도 “피곤한 줄 모르겠다”며 더 열심히 일했고, 선배들도 “맨날 똑같아서 지루했는데 단기간에 많이 배운다”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점장님은 결과물 하나하나를 세심히 피드백했고, 하루가 다르게 매장이 달라졌다.
그때 공산 선배가 한 말은 아직도 기억난다.
“OO담당, 내 요즘에 고등학교 때 선생님 생각난다. 억수로 뭐라 했는데, 그래도 하나라도 잘하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 그게 여기서 생각날 줄이야, 하하하.”
특히 여사원들이 가장 좋아했던 건 연근(초과 근무 수당)이었다.
사실 인건비가 가장 큰 이슈라, 현실적으로는 퇴근 버튼을 누른 뒤에도 남아 일하는 게 업계의 ‘암묵지’였다. 그런데 점장님은 달랐다. 열심히 한 시간은 반드시 보상받아야 한다며 본사에 직접 이야기해 초과 근무 수당을 정식으로 처리해 주셨다.
여사원들은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더 열심히 일했고, 매장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본사에서도 그 성과를 인정했고, 점장님이 부임한 지 단 한 달 만에 전년 대비 매출은 두 배를 넘어섰다.
손익 구조도 개선됐다.
과연, 이 점장님을 욕할 사람이 있을까.
과일은 매장의 꽃
성수기 시즌이 다가왔다. 7월과 8월은 평소 매출의 두세 배를 올리는 시기다.
점장님은 담당자들을 모아 말했다.
“메인으로 팔 품목을 각 2개씩 정해 오세요.”
그리고 직접 전단지 콘셉트를 설명했다.
“이번엔 OO점이 전국 매장의 한 획을 긋게 할 겁니다. 대표님도 직접 방문하실 정도의 매장으로 만들 겁니다. 다들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 이후로 나는 후배·선배가 멋있는 일을 하면 나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두근거림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점장님은 내게 또 물었다.
“매장의 꽃은 뭐라고 생각해?”
“과일이요. 진열에 따라 고객 이미지가 그려지고…”
“그래. 잘 봐봐. 과일이란 게 색이 어때? 빨강, 노랑, 초록, 보라… 색감이 얼마나 살아 있니.
고객이 문 열고 딱 들어왔을 때 그 과일 진열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보이면?
‘이 매장 괜찮다’ 하는 이미지가 바로 박힌다.“
“네 그렇네요! 맞네요 점장님!”
“그렇지? 게다가 과일은 계절 따라 바뀌고, 상태도 매일 달라. 그날그날 느낌도 연출할 수 있고,
매장 분위기도 싱그러워지고, ‘오늘 신선하네’ 이 말 한마디가 매장을 살려주는 거야.”
사람이 원래 예쁜 걸 보면 걸음이 느려진다. 마음에 없던 사람도 예쁜 사람이 지나가면 한번 보잖아?
과일도 그래. 복숭아가 윤기 나게 쌓여 있고, 멜론이 잘 정렬돼 있으면 멈춘다. 살 생각 없던 사람도 멈춰.
멈추면? 사게 돼.”
“오… 그건 진짜 몰랐네요. 그럼 진열이 되게 중요하겠네요?”
“엄청 중요하지. 단순히 올려놓는 게 아니라, 감각을 보여주는 거야.
매장에 꽃향기가 퍼지는 느낌 있잖아. 꽃은 말 안 해도 향으로 사람을 끌어당기고,
과일은 시각과 냄새로 매장을 살려준다. 그걸 누가 잘 연출하느냐, 거기서 실력이 갈리는 거지.”
“점장님 말 들으니까 과일 진열하는 게 엄청 중요하게 느껴져요.”
“그래, 그게 진짜야. ‘매장의 주인은 고객이고, 그 첫인상은 과일이 만든다.’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근데 사실 거기에 하나 더 중요한 게 있어.”
“혹시… 시식?”
“아니, 시식도 물론 중요해 근데 가격이야 가격, 예쁜 걸 보고 멈췄는데 가격도 저렴해?
근데 맛까지…? 이건 끝이라고 보면 된다.”
“네 그럼 제가 한번 본사 MD에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마 전국에서 다 해달라고 하는데 우리 같은 중형 점포까지 해줄 여력이 없을 거야”
내가 번호하나 줄 테니까 OO담당이 직접 연락해서 한번 가봐.”
하며 번호를 하나 알려주셨다. 번호에는 “OO농산 최사장”이라고 되어있었고.
내가 처음으로 농산물시장에서 물건을 사입한 가게의 사장이었고,
거기서 새벽녘의 공기를 마시며 경매도 경험했었던 일반직장인이 느낄 수 없었던 최고의 경험이었다.
복숭아 한입이 열어준 인연
다음날 아침 진열을 끝내고 전화를 몇 번 했는데 안 받아서 문자를 남겼다.
OO점장님 소개로 인사드리는 oo점 과일담당입니다. 연락부탁드립니다.
5분도 안돼서 전화가 왔다.
“어~oo담당 반가워~~~~”
“절 아세요?”
“과일담당이면 뭐 다 인연이지 모~~ 뭐 필요하세요?”
“저 복숭아랑 포도요.”
“OO농산물 xx층 xx 사무실로 오세요.”
“언제까지 갈까요?”
“지금 오세요. 우리도 이제 쉬는 타임이라.”

난 바로 OO농산물센터로 갔다. 조직의 보스같이 보이는 하얀 머리 아저씨와 대머리에 마른 아저씨,
그 옆에 젊은 청년 두 명이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약간…무서웠다.
“아 OO담당?”
“네 안녕하세요~”
“어 반가워 우선 이거 먹어봐.” (복숭아를 하나 잘라 준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한입 베어무니 세상에 정말 꿀맛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가 있다니.
“와.. 너무 맛있네요.”
“그게 담당님이 팔 복숭아여.”
“아 정말요?”
“몇 박스 필요해?”
“아 아직까지는 생각을 못해서…”
“한 2천 박스 가져가.”
“네?” (이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저희는 이 정도 물량은 소화 못하는데요…”
“할 수 있으니까 가져가 보소.”
나는 급히 점장님께 전화를 드려 상황을 말씀드렸다.
“하하하 여전하네 최사장.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처음에 다 그런 거니까 한번 둘러보고 와~.”
알고 보니 처음엔 장난이셨다. 점장님이 백화점 시절 함께 일했던 유명한 사장님이었고,
내일 새벽 3시에 다시 오라고 하셨다. 산지 물건 경매를 직접 보여주시겠다는 것.
새벽 경매장에서 배운 것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그래도 경험이지’ 하고 새벽에 경매장을 찾았다.
다음 날 새벽 3시.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몸은 피곤했지만 묘하게 설레는 마음이 있었다.
‘과일 하나 보러 갔다가… 내가 새벽에 경매장을 가고 있네…’
참 그날 새벽공기는 맑고 시원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처음 마주한 경외심과 두근거림은,
마치 러닝을 시작할 때의 가슴 벅찬 고동 같았다.
시장 입구에 도착하니 어제 봤던 사장님이 이미 도착해 계셨다.
“왔어? 저쪽으로 가보쇼. 오늘 물건 괜찮아.”
커다란 전등 아래, 트럭에서 복숭아 박스가 쏟아지듯 내려오고 있었다. 포장도 가지런했고, 박스 옆 당도표에는 ‘13 Brix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신선한 산지 물건의 기운이 그대로 느껴졌다.
잠시 후 경매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 복숭아! 13 브릭스 이상! 한 상자 OOO원!”
수북하게 쌓인 복숭아들 사이로 중도매인들이 고개를 까딱이며 가격을 올렸다.
누구 하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눈빛과 손짓만으로 입찰이 이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말보다 먼저, 물건을 보는 눈이 필요하구나.’
좋은 물건은 말이 필요 없다. 멈추게 만들고, 확신이 들면 사게 된다.
사장님이 보여주려던 건 복숭아 한 박스가 아니라, “좋은 물건이란 이런 거다”라는 감각 그 자체였다.
매장으로 돌아와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사장님, 오늘 봤던 복숭아. 8월에 한번 제대로 팔아보고 싶어요.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그 복숭아로 가져가 보쇼. 맛은 이미 봤으니 믿겠지?”
8월 초 복숭아가 매장에 도착했다.
고객들에게 이제는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건 제가 직접 보고 온 복숭아예요.”
그건 내 첫 번째 경험 기반 진열 상품이었다.
1,500박스의 도전
한숨이 계속 나왔다. 내가 왜 이걸 이렇게 발주했을까. 내가 미쳤지…
우리 매장은 중형 매장으로 약 300평 규모, 농산만 따지면 40~50평 남짓.
작년 같은 기간 복숭아 매출은 일주일에 100박스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엔 무려 1,500박스.
점장님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OO담당, 내가 믿고 맡기긴 했… 생각은 있는 거지?”
“…… 해보겠습니다. 전단 뿌리는 지역을 평소보다 더 넓히고, 고객 SMS도 우수 고객 외 일반 고객까지 전송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그래해보자고!”
공산 선배도 웃으며 말했다.
“OO담당, 니 미친 거 아이가? 이거 어째 팔라고… 다 팔고 퇴사해라, 하하하.”
하지만 나는 다짐했다.
‘이까짓 거 하면 되지. 가격은 타 매장 대비 3천 원 저렴하고, 홍보 문제없고, 맛은 최고. 나는 할 수 있다.’
여사원들에게도 부탁했다. “다른 것보다, 복숭아 우선으로 팔아주세요.”
그리고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OO점 기절초풍 세일! 다신 오지 않을 이 가격! 고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거대한 매장 앞 현수막이 걸렸다.
아직도 15년 전 그날이 생생하다.
내 인생의 아름다운 경험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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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님의 발령 소식
한 달, 두 달… 신입사원으로 매장에 온 지 6개월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정신없었지만, 그만큼 매장 안팎의 다양한 사람들과 매일 소통하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 내 인생의 여백을 소중한 경험들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매장 점장들은 지역별로 돌며 권역의 여러 매장을 경험한다.
어느 날, 점장님이 갑자기 발령 예정이라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기분이 좋아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엄하게 가르침을 받아 미울 때도 있었지만 막상 가신다니 섭섭했다.
“OO야~ 내 발령 이야기 들었지? 나 간다~!”
“네… 점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OO는 나중에 나를 또 만날 수도 있겠네~?”
“네?”
“응. 나 너 사는 지역 매장으로 발령 나니까, 나중에 너도 여기 올 수 있어.”
(섭섭한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다, 하하.)
그렇게 이전 점장님이 떠나고, 새 점장님이 오셨다.
새로운 리더의 등장
K**치킨 할아버지를 닮은 외모, 중후한 목소리, 묘한 포스.
알고 보니 백화점 과일·가공 MD 경력이 어마어마한 분이었다.
첫 아침 조회에서 직원들과 인사를 마치고 딱 한마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원래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나중에 보고 말씀드릴게요.”
모두 평소처럼 매장 업무를 했고, 일주일 뒤 월요일에 처음으로 입을 여셨다.
“일주일간 여러분이 하는 일 구석구석 잘 보았고요, 전반적으로 개선할 점이 있습니다. 오늘부터 돌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곧 대대적인 체인지였다.
매장 *POP 광고 방법부터 디자인, 매대 연출, 여사원별 출근 시간 체크, 제품 진열 변경, 담당별 체크리스트·과제까지—정말 어마어마했다.
(*POP : 고객이 구매를 결정하는 공간/진열대 근처의 모든 시각 광고물)
칭찬과 신뢰의 힘
정말 너무 힘들었다.
기본 일 외에 추가로 나열된 일이 끝도 없었다. ‘이게 맞나…’ 싶었지만 부딪혔다. 배움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점장님이 조용히 옆에 앉아 말씀하셨다.
“OO 담당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되게 잘하네?”
“네? 제가요? 시킨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아직 입사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내가 시킨 과제라든지 오후 방송, 과일 발주 센스, 재고 금액 맞추는 것도 오차가 거의 없고… 혹시나 해서 창고를 가 봤더니 웬만큼 거짓이 아닌 실사로 다 맞춰놨더라고. 일을 하다 온 거야?”
“아뇨, 졸업하고 첫 회사인데요…”
“그래? 근데 일을 이렇게 잘해? 여기서 일하다가 어디 가고 싶어?”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진짜 열심히 해봐. 본사 슈퍼바이저로 보내줄 테니까.”
“좋은 건가요?”
“아니, OO 담당은 뭐 이렇게 아는 게 없어, 하하하.”
순간 당황스러웠다. 칭찬인지, 놀림인지 헷갈렸다. ‘본사 슈퍼바이저’라는 말도 생소했다.
동기들과 교육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보통은 순환근무로 빠지지만 본사 슈퍼바이저는 업무를 잘하는 직원만 갈 수 있는 자리라고 했다. 그때 생각했다.
‘와, 나도 가야지. 열심히 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칭찬과 신뢰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도록 열심히 하게 만드는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아침 조회에서 “OO 담당처럼 해보세요”, “OO 담당 실적이 제일 좋네요”라는 칭찬은 사실 매일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과일 담당이 이렇게까지 주목받을 수 있구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 적을 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또한 기회라 믿고, 다른 담당과 다른 코너의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도우며 함께하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시기와 질투가 뒤섞였지만, 점장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칭찬하고 피드백을 주자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여사원들도 “피곤한 줄 모르겠다”며 더 열심히 일했고, 선배들도 “맨날 똑같아서 지루했는데 단기간에 많이 배운다”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점장님은 결과물 하나하나를 세심히 피드백했고, 하루가 다르게 매장이 달라졌다.
그때 공산 선배가 한 말은 아직도 기억난다.
“OO담당, 내 요즘에 고등학교 때 선생님 생각난다. 억수로 뭐라 했는데, 그래도 하나라도 잘하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 그게 여기서 생각날 줄이야, 하하하.”
특히 여사원들이 가장 좋아했던 건 연근(초과 근무 수당)이었다.
사실 인건비가 가장 큰 이슈라, 현실적으로는 퇴근 버튼을 누른 뒤에도 남아 일하는 게 업계의 ‘암묵지’였다. 그런데 점장님은 달랐다. 열심히 한 시간은 반드시 보상받아야 한다며 본사에 직접 이야기해 초과 근무 수당을 정식으로 처리해 주셨다.
여사원들은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더 열심히 일했고, 매장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본사에서도 그 성과를 인정했고, 점장님이 부임한 지 단 한 달 만에 전년 대비 매출은 두 배를 넘어섰다.
손익 구조도 개선됐다.
과연, 이 점장님을 욕할 사람이 있을까.
과일은 매장의 꽃
성수기 시즌이 다가왔다. 7월과 8월은 평소 매출의 두세 배를 올리는 시기다.
점장님은 담당자들을 모아 말했다.
“메인으로 팔 품목을 각 2개씩 정해 오세요.”
그리고 직접 전단지 콘셉트를 설명했다.
“이번엔 OO점이 전국 매장의 한 획을 긋게 할 겁니다. 대표님도 직접 방문하실 정도의 매장으로 만들 겁니다. 다들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 이후로 나는 후배·선배가 멋있는 일을 하면 나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두근거림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점장님은 내게 또 물었다.
“매장의 꽃은 뭐라고 생각해?”
“과일이요. 진열에 따라 고객 이미지가 그려지고…”
“그래. 잘 봐봐. 과일이란 게 색이 어때? 빨강, 노랑, 초록, 보라… 색감이 얼마나 살아 있니.
고객이 문 열고 딱 들어왔을 때 그 과일 진열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보이면?
‘이 매장 괜찮다’ 하는 이미지가 바로 박힌다.“
“네 그렇네요! 맞네요 점장님!”
“그렇지? 게다가 과일은 계절 따라 바뀌고, 상태도 매일 달라. 그날그날 느낌도 연출할 수 있고,
매장 분위기도 싱그러워지고, ‘오늘 신선하네’ 이 말 한마디가 매장을 살려주는 거야.”
사람이 원래 예쁜 걸 보면 걸음이 느려진다. 마음에 없던 사람도 예쁜 사람이 지나가면 한번 보잖아?
과일도 그래. 복숭아가 윤기 나게 쌓여 있고, 멜론이 잘 정렬돼 있으면 멈춘다. 살 생각 없던 사람도 멈춰.
멈추면? 사게 돼.”
“오… 그건 진짜 몰랐네요. 그럼 진열이 되게 중요하겠네요?”
“엄청 중요하지. 단순히 올려놓는 게 아니라, 감각을 보여주는 거야.
매장에 꽃향기가 퍼지는 느낌 있잖아. 꽃은 말 안 해도 향으로 사람을 끌어당기고,
과일은 시각과 냄새로 매장을 살려준다. 그걸 누가 잘 연출하느냐, 거기서 실력이 갈리는 거지.”
“점장님 말 들으니까 과일 진열하는 게 엄청 중요하게 느껴져요.”
“그래, 그게 진짜야. ‘매장의 주인은 고객이고, 그 첫인상은 과일이 만든다.’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근데 사실 거기에 하나 더 중요한 게 있어.”
“혹시… 시식?”
“아니, 시식도 물론 중요해 근데 가격이야 가격, 예쁜 걸 보고 멈췄는데 가격도 저렴해?
근데 맛까지…? 이건 끝이라고 보면 된다.”
“네 그럼 제가 한번 본사 MD에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마 전국에서 다 해달라고 하는데 우리 같은 중형 점포까지 해줄 여력이 없을 거야”
내가 번호하나 줄 테니까 OO담당이 직접 연락해서 한번 가봐.”
하며 번호를 하나 알려주셨다. 번호에는 “OO농산 최사장”이라고 되어있었고.
내가 처음으로 농산물시장에서 물건을 사입한 가게의 사장이었고,
거기서 새벽녘의 공기를 마시며 경매도 경험했었던 일반직장인이 느낄 수 없었던 최고의 경험이었다.
복숭아 한입이 열어준 인연
다음날 아침 진열을 끝내고 전화를 몇 번 했는데 안 받아서 문자를 남겼다.
OO점장님 소개로 인사드리는 oo점 과일담당입니다. 연락부탁드립니다.
5분도 안돼서 전화가 왔다.
“어~oo담당 반가워~~~~”
“절 아세요?”
“과일담당이면 뭐 다 인연이지 모~~ 뭐 필요하세요?”
“저 복숭아랑 포도요.”
“OO농산물 xx층 xx 사무실로 오세요.”
“언제까지 갈까요?”
“지금 오세요. 우리도 이제 쉬는 타임이라.”

난 바로 OO농산물센터로 갔다. 조직의 보스같이 보이는 하얀 머리 아저씨와 대머리에 마른 아저씨,
그 옆에 젊은 청년 두 명이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약간…무서웠다.
“아 OO담당?”
“네 안녕하세요~”
“어 반가워 우선 이거 먹어봐.” (복숭아를 하나 잘라 준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한입 베어무니 세상에 정말 꿀맛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가 있다니.
“와.. 너무 맛있네요.”
“그게 담당님이 팔 복숭아여.”
“아 정말요?”
“몇 박스 필요해?”
“아 아직까지는 생각을 못해서…”
“한 2천 박스 가져가.”
“네?” (이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저희는 이 정도 물량은 소화 못하는데요…”
“할 수 있으니까 가져가 보소.”
나는 급히 점장님께 전화를 드려 상황을 말씀드렸다.
“하하하 여전하네 최사장.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처음에 다 그런 거니까 한번 둘러보고 와~.”
알고 보니 처음엔 장난이셨다. 점장님이 백화점 시절 함께 일했던 유명한 사장님이었고,
내일 새벽 3시에 다시 오라고 하셨다. 산지 물건 경매를 직접 보여주시겠다는 것.
새벽 경매장에서 배운 것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그래도 경험이지’ 하고 새벽에 경매장을 찾았다.
다음 날 새벽 3시.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몸은 피곤했지만 묘하게 설레는 마음이 있었다.
‘과일 하나 보러 갔다가… 내가 새벽에 경매장을 가고 있네…’
참 그날 새벽공기는 맑고 시원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처음 마주한 경외심과 두근거림은,
마치 러닝을 시작할 때의 가슴 벅찬 고동 같았다.
시장 입구에 도착하니 어제 봤던 사장님이 이미 도착해 계셨다.
“왔어? 저쪽으로 가보쇼. 오늘 물건 괜찮아.”
커다란 전등 아래, 트럭에서 복숭아 박스가 쏟아지듯 내려오고 있었다. 포장도 가지런했고, 박스 옆 당도표에는 ‘13 Brix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신선한 산지 물건의 기운이 그대로 느껴졌다.
잠시 후 경매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 복숭아! 13 브릭스 이상! 한 상자 OOO원!”
수북하게 쌓인 복숭아들 사이로 중도매인들이 고개를 까딱이며 가격을 올렸다.
누구 하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눈빛과 손짓만으로 입찰이 이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말보다 먼저, 물건을 보는 눈이 필요하구나.’
좋은 물건은 말이 필요 없다. 멈추게 만들고, 확신이 들면 사게 된다.
사장님이 보여주려던 건 복숭아 한 박스가 아니라, “좋은 물건이란 이런 거다”라는 감각 그 자체였다.
매장으로 돌아와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사장님, 오늘 봤던 복숭아. 8월에 한번 제대로 팔아보고 싶어요.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그 복숭아로 가져가 보쇼. 맛은 이미 봤으니 믿겠지?”
8월 초 복숭아가 매장에 도착했다.
고객들에게 이제는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건 제가 직접 보고 온 복숭아예요.”
그건 내 첫 번째 경험 기반 진열 상품이었다.
1,500박스의 도전
한숨이 계속 나왔다. 내가 왜 이걸 이렇게 발주했을까. 내가 미쳤지…
우리 매장은 중형 매장으로 약 300평 규모, 농산만 따지면 40~50평 남짓.
작년 같은 기간 복숭아 매출은 일주일에 100박스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엔 무려 1,500박스.
점장님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OO담당, 내가 믿고 맡기긴 했… 생각은 있는 거지?”
“…… 해보겠습니다. 전단 뿌리는 지역을 평소보다 더 넓히고, 고객 SMS도 우수 고객 외 일반 고객까지 전송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그래해보자고!”
공산 선배도 웃으며 말했다.
“OO담당, 니 미친 거 아이가? 이거 어째 팔라고… 다 팔고 퇴사해라, 하하하.”
하지만 나는 다짐했다.
‘이까짓 거 하면 되지. 가격은 타 매장 대비 3천 원 저렴하고, 홍보 문제없고, 맛은 최고. 나는 할 수 있다.’
여사원들에게도 부탁했다. “다른 것보다, 복숭아 우선으로 팔아주세요.”
그리고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OO점 기절초풍 세일! 다신 오지 않을 이 가격! 고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거대한 매장 앞 현수막이 걸렸다.
아직도 15년 전 그날이 생생하다.
내 인생의 아름다운 경험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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