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콘텐츠 마케터라고 하면 다들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알잘딱깔센한 카드뉴스, 트렌디한 브랜드 계정, 바이럴을 노린 드립 하나쯤은 기본 장착. 그런데 내가 했던 마케팅은 그거랑은 조금 달랐다. 나는 ‘국책 마케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나라에서 수주한 공공기관 SNS를 운영하는 일을 맡은 중소기업에서 일했다. 담당 채널은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직함은 인턴이었는데 업무는 인턴이라고 하기엔 좀 과했다. 콘텐츠 기획은 기본이고, 카드뉴스 디자인도 내가 했고, 캡션 작성, 업로드, 해시태그 정리, 댓글 관리까지 전부 맡았다. 콘텐츠 하나를 올리기 위해 초안부터 최종 게시까지 모든 과정을 내가 다루는 구조였다. 처음엔 이 정도면 실무 경험으로 꽤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문제는 콘텐츠 자체에 있었다.
국책 마케팅은 재미가 없어야 한다. 아니, 정확히는 재미있으면 안 되는 구조에 가깝다. 유행어는 쓰면 안 되고, 연예인 언급은 금지고, 특정 시기에는 민감한 키워드는 자동으로 필터링된다. 콘텐츠가 너무 광고처럼 보여도 바로 반려당했다. 드립은 기본적으로 금지, 표현은 정제, 분위기는 무해해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조회수는 나와야 했다. 인지도를 높이는 게 1차 목표였고, 관련 정책 보고서를 다운로드하게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조회수, 좋아요, 클릭률, 다운로드 수… 다 지표로 남고, 매주 보고서에 들어갔다. 숫자가 안 나오면 무실이 조용해졌다. 심할 때는 직원들이 각자 개인 기기에서 보고서를 내려받기도 했다. 숫자 하나 채우려고 다 같이 클릭을 나눠 가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전통 같은 거였다.
아이디어는 넘치지만 표현은 조심해야 하고, 자극은 피해야 하는데 퍼져야 하는 콘텐츠. 말하자면 평범한 재료로 미슐랭 요리를 만들라는 식이었다. 차라리 내가 수석 셰프였으면 납득이라도 했을 텐데, 그땐 막 3학년 1학기를 마친 인턴이었다. 시즈닝도, 도마도, 불 조절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그럴듯한 접시를 내야 했다. 어쨌든 숫자는 나와야 하니까.

한 번은 정말로 조회수가 심각하게 안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모두가 이유는 알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때 나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법안과 기관의 주요 업무를 연결해 콘텐츠를 기획하는 방식이었다. 연예인 실명은 언급하지 않았고 법률만 남겨 메시지를 구성했다. 나는 괜찮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기획은 아무 말 없이 엎어졌다. 위험 부담 때문이라는 한 문장이 모든 설명이었다. 그럴 거면 왜 처음부터 고개를 끄덕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만든 콘텐츠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결과물은 없다. 만들긴 내가 만들었지만, 늘 담당자 확인을 거쳐야 했다. 피드백에 따라 레이아웃도, 문장도, 심지어 의도도 바뀌는 구조. 인턴이 낸 결과물은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남의 것도 아니었다. 내 손으로 만든 콘텐츠를 내 콘텐츠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그 시기에 나는 내가 뭘 믿고 이 일을 시작했는지를 자꾸 까먹었다. ‘실무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 ‘경력이니까 버텨야 한다’는 말, 다 내가 나한테 했던 말이었다. 말은 경험이라는데 정작 매일 하고 있는 일은 ‘이건 빼고, 저건 바꾸고, 그건 위험하다’는 피드백에 맞춰 조금씩 줄어드는 작업이었다. 기획은 내가 하는데 결과물엔 내 흔적이 남지 않는 구조. 내가 만든 콘텐츠인데 내 콘텐츠가 아닌 걸 매일 만들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방향도 모르겠고 동기도 흐릿해진다. 말하자면 계속 뭔가를 쓰고 있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상태.
그래도 그 시기에 남은 건 있다. 자극을 걷어낸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말투와 어조, 문장의 결을 훨씬 더 세밀하게 보게 됐다. 재밌게 쓰는 건 금지였지만 매끄럽게 쓰는 건 의무였다. 메시지를 정리하고, 안전한 톤앤매너 안에서 분명한 구조를 만드는 연습. 그건 지금도 쓰인다. 그전까지 나는 다소 자극적인 카피에 집착하는 편이었는데, 그 경험을 거치고 나선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삼삼하지만 오래 남는 콘텐츠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 일을 계속한 이유는 간단했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고, 당시 나는 휴학 중이었으며 복학을 하기에도 시기가 애매했다. 생각했던 마케터의 일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경력이었다.
그 시기엔 늘 재미없는 걸 만들면서도, 어떻게든 지루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버텼다. 그래서 가끔 그때 만든 카드뉴스들을 열어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지금 만들라고 해도 저렇게는 못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던하고, 무난하고, 그래서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다.
(2)
처음엔 콘텐츠 마케터였다. 정확히는 콘텐츠 마케터라는 이름으로 채용된 인턴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는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언론사엔 기자가 나 하나였고 외부 기자라고 불리는 서포터즈 50명이 있었다. 시작은 50명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수료한 건 절반도 되지 않았다. 경력증명서와 수료증이라는 두 개의 결과를 조건으로 그들은 매주 직접 취재한 기사를 한 편씩 써야 했다.
기사 발행 기준도 분명했다. 짜깁기나 정보 취합은 안 되고, 꼭 인터뷰나 현장 방문이 들어가야 했다. 대학생 입장에선 시간도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이 구조가 유지된 이유는 단 하나, 그게 ‘경력이 될 수도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 얼마나 허망한지. 기사는 포털 노출도 되지 않는 자체 매체에만 올라갔고, 조회수는 대부분 100을 넘지 못했다. 나조차도 이걸 내 포트폴리오에 넣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 구조를 돌리는 사람이 나였다. 기사를 관리하고, 퇴고하고, 마감 독촉 메일을 보내고, 수료 조건을 체크한 사람. 누구보다 그 시스템의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계속 사람을 굴리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업무였고 내 일이니까 했다. 그런데 점점 내가 이 구조의 일원이 아니라 운영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 일이 기사 쓰는 일에만 그쳤다면 그래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 바깥에 있었다. 회사에서 무언가 물량이 필요해지면 이미 수료한 서포터즈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공모전 참가자가 부족해도 불렀고 캠페인 홍보가 필요해도 불렀다. 공식적인 보상은 없었다. “혹시 시간 되면 도와줄 수 있을까요?” 같은 말투로 반복된 요청들. 나는 그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협조적인 상태’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떠나지 않고, 기사를 쓰고, 다시 호출에도 응해주기를.
나는 원래 그 서포터즈였다. 직접 겪어본 사람의 시선에서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보였다. 그런데 인턴으로 들어오고 나서 곧바로 이해하게 됐다. 이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선 아무것도 아닌 허울뿐인 서류들로 대학생을 묶어야 한다는 걸. 그 구조가 부당하다는 걸 알았지만 동시에 그 구조가 유지되어야 내 일이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바랐다. 그들이 버텨주기를. 마감일을 지켜주기를. 그만두지 않기를.
그게 제일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이제 서포터즈를 돕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버티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수료증과 경력증명서는 내가 직접 만들었다. 이름을 입력하고, 서명을 받고, 도장을 챙겼다. 나중에 다른 인턴십을 하면서야 알게 됐다. 그 문서들은 어디에도 내밀 수 없는 종이였고, 그 시간은 어디에도 기입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구조를 바꾸려 한 적도 있었다. 기사 수를 줄이자고 했고 활동 기간도 단축하자고 제안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가 일이 늘어나잖아”라는 한 문장 때문이었다. 그 ‘우리’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내 직함은 인턴이었고, 인턴의 말은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결국 나는 내 감각을 누른 채 시스템을 돌리는 사람으로 남았다. 책임을 졌다기보다는, 계속해서 다음 주의 기사를 정리했고, 마감일을 체크했고, 수료 인원을 집계했다. 구조는 유지됐고 나는 그 안에서 매끄럽게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게 옳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3)
처음엔 그랬다. 콘텐츠 마케터라고 하니 콘텐츠를 만들었다. 기획하고, 편집하고, 관리하고. 일이 많긴 해도 적어도 이름과 역할은 일치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도와줄 수 있어?’로 시작한 일들이 그냥 내 일이 되어갔다. 기획이었는데 인사팀 일이 되고, 편집이었는데 총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다 내 전공인 줄 알겠다.
가장 황당했던 건 외국인 대상 행사 준비였다. 외국어 가능자를 단기 알바로 뽑아야 한다며 알바몬 계정을 나한테 넘기더니, 지원서 검토부터 면접 일정 조율까지 전부 해달라고 했다. 업무 분장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걸 그때 처음 체감했다. 인사팀은 존재하긴 했다. 실장도 있었다. 다만 그 사람은 대표 친구였고 진짜 ‘일’은 하지 않았다. 어쩐지, 업무 공백이 생기면 자꾸 밑으로 내려오더라. 대체 왜 그런 일까지 하고 있나 싶었지만, 어느새 나는 지원자 엑셀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도가 있다면, 언론사 편집인을 내 이름으로 등록하자는 이야기는 그 선을 넘은 순간이었다. 보통 언론사 홈페이지 하단에는 편집인, 청소년보호책임자 같은 정보가 적히는데, 그 자리에 내 이름을 넣자고 했다. 발행인은 대표고, 나머지는 인턴인 나더러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그걸 듣는 순간 ‘좋은 건 위에서 가져가고, 법적 책임은 아래로 미는구나’ 싶었다. 이상하다고 말은 했고 결국 이름이 올라가진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 내 태도에 대해 말이 나왔다. “홈페이지 관리를 왜 이렇게 소홀히 하냐”는 식으로.
그건 정말 당황스러웠다. 나는 홈페이지 담당자가 아니었고, 인수인계도 없었고, 운영사 연락처조차 받은 적이 없었다. 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네가 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월급은 인턴 월급인데 무슨, 나보고 이 쥐꼬리로 뭘 하라고.
그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알게 됐다. 이 조직에선 누군가가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가장 말이 적은 사람한테 일이 내려온다는 걸. 정확히는, 말이 적고 직급이 낮은 사람. 그리고 대부분 그게 나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냐는 질문은 사실 “네가 하는 게 제일 편하다”는 말의 포장일 뿐이었다.
그래서 책임도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내가 관리하지 않은 시스템의 오류가 내 탓이 됐고, 내가 인수인계받지 않은 업무의 공백도 내 몫이 됐다. 내가 만든 문제가 아님을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그런 설명보다 필요한 건 ‘그럼 지금부터라도 해보겠다’는 자세였다. 알아서 해라,는 말을 돌려 말하면 결국 그렇다는 뜻이다.
그 시점부터 감정이 흔들렸다. 이건 단순히 일이 많아서 힘든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가 내 일인지 말할 수 없고, 책임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내려오고, 나는 계속 내가 아니었던 사람처럼 일해야 했다. 마케터였다가 인사팀이었다가 시스템 관리자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그냥 누군가의 방패막이 같았다. 직함은 그대로였지만, 역할은 사라지고 있었다.
결정적인 건 그날이었다. 또다시 시스템 문제에 대해 지적을 받았고, 그건 담당자가 따로 있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런 건 직접 알아가야지, 왜 못하겠다고만 하냐”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이 확 뒤집혔다. 인수인계도 없었고, 시스템 구조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거기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땐 참을 이유를 못 찾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말했다. 저 이번 달까지만 하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택이 빠른 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냥 버티던 거였다. 경력이 될 거라 믿어서, 그래도 이 경험은 어딘가에 쓰일 거라 생각해서. 그런데 점점 깨달았다. 이건 경력이 아니라 고장이었다. 더 이상 마케터로 일하는 게 아니라, 마케터인 척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러다 어느 날 확실히 선을 넘는 순간이 오면, 그런 척조차 못 하게 된다. 나는 그 지점이 여기라고 판단했다.
퇴사하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조금 명확해졌다. 아무리 잘해도 내 일이 아닌 건 내 일이 아니고, 아무리 조용히 해도 책임은 무작위로 내려온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구조에서 계속 버티는 사람이 결국 책임까지 떠안는다는 사실. 나는 그걸 거절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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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마케터라고 하면 다들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알잘딱깔센한 카드뉴스, 트렌디한 브랜드 계정, 바이럴을 노린 드립 하나쯤은 기본 장착. 그런데 내가 했던 마케팅은 그거랑은 조금 달랐다. 나는 ‘국책 마케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나라에서 수주한 공공기관 SNS를 운영하는 일을 맡은 중소기업에서 일했다. 담당 채널은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직함은 인턴이었는데 업무는 인턴이라고 하기엔 좀 과했다. 콘텐츠 기획은 기본이고, 카드뉴스 디자인도 내가 했고, 캡션 작성, 업로드, 해시태그 정리, 댓글 관리까지 전부 맡았다. 콘텐츠 하나를 올리기 위해 초안부터 최종 게시까지 모든 과정을 내가 다루는 구조였다. 처음엔 이 정도면 실무 경험으로 꽤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문제는 콘텐츠 자체에 있었다.
국책 마케팅은 재미가 없어야 한다. 아니, 정확히는 재미있으면 안 되는 구조에 가깝다. 유행어는 쓰면 안 되고, 연예인 언급은 금지고, 특정 시기에는 민감한 키워드는 자동으로 필터링된다. 콘텐츠가 너무 광고처럼 보여도 바로 반려당했다. 드립은 기본적으로 금지, 표현은 정제, 분위기는 무해해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조회수는 나와야 했다. 인지도를 높이는 게 1차 목표였고, 관련 정책 보고서를 다운로드하게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조회수, 좋아요, 클릭률, 다운로드 수… 다 지표로 남고, 매주 보고서에 들어갔다. 숫자가 안 나오면 무실이 조용해졌다. 심할 때는 직원들이 각자 개인 기기에서 보고서를 내려받기도 했다. 숫자 하나 채우려고 다 같이 클릭을 나눠 가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전통 같은 거였다.
아이디어는 넘치지만 표현은 조심해야 하고, 자극은 피해야 하는데 퍼져야 하는 콘텐츠. 말하자면 평범한 재료로 미슐랭 요리를 만들라는 식이었다. 차라리 내가 수석 셰프였으면 납득이라도 했을 텐데, 그땐 막 3학년 1학기를 마친 인턴이었다. 시즈닝도, 도마도, 불 조절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그럴듯한 접시를 내야 했다. 어쨌든 숫자는 나와야 하니까.

한 번은 정말로 조회수가 심각하게 안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모두가 이유는 알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때 나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법안과 기관의 주요 업무를 연결해 콘텐츠를 기획하는 방식이었다. 연예인 실명은 언급하지 않았고 법률만 남겨 메시지를 구성했다. 나는 괜찮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기획은 아무 말 없이 엎어졌다. 위험 부담 때문이라는 한 문장이 모든 설명이었다. 그럴 거면 왜 처음부터 고개를 끄덕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만든 콘텐츠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결과물은 없다. 만들긴 내가 만들었지만, 늘 담당자 확인을 거쳐야 했다. 피드백에 따라 레이아웃도, 문장도, 심지어 의도도 바뀌는 구조. 인턴이 낸 결과물은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남의 것도 아니었다. 내 손으로 만든 콘텐츠를 내 콘텐츠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그 시기에 나는 내가 뭘 믿고 이 일을 시작했는지를 자꾸 까먹었다. ‘실무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 ‘경력이니까 버텨야 한다’는 말, 다 내가 나한테 했던 말이었다. 말은 경험이라는데 정작 매일 하고 있는 일은 ‘이건 빼고, 저건 바꾸고, 그건 위험하다’는 피드백에 맞춰 조금씩 줄어드는 작업이었다. 기획은 내가 하는데 결과물엔 내 흔적이 남지 않는 구조. 내가 만든 콘텐츠인데 내 콘텐츠가 아닌 걸 매일 만들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방향도 모르겠고 동기도 흐릿해진다. 말하자면 계속 뭔가를 쓰고 있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상태.
그래도 그 시기에 남은 건 있다. 자극을 걷어낸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말투와 어조, 문장의 결을 훨씬 더 세밀하게 보게 됐다. 재밌게 쓰는 건 금지였지만 매끄럽게 쓰는 건 의무였다. 메시지를 정리하고, 안전한 톤앤매너 안에서 분명한 구조를 만드는 연습. 그건 지금도 쓰인다. 그전까지 나는 다소 자극적인 카피에 집착하는 편이었는데, 그 경험을 거치고 나선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삼삼하지만 오래 남는 콘텐츠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 일을 계속한 이유는 간단했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고, 당시 나는 휴학 중이었으며 복학을 하기에도 시기가 애매했다. 생각했던 마케터의 일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경력이었다.
그 시기엔 늘 재미없는 걸 만들면서도, 어떻게든 지루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버텼다. 그래서 가끔 그때 만든 카드뉴스들을 열어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지금 만들라고 해도 저렇게는 못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던하고, 무난하고, 그래서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다.
(2)
처음엔 콘텐츠 마케터였다. 정확히는 콘텐츠 마케터라는 이름으로 채용된 인턴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는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언론사엔 기자가 나 하나였고 외부 기자라고 불리는 서포터즈 50명이 있었다. 시작은 50명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수료한 건 절반도 되지 않았다. 경력증명서와 수료증이라는 두 개의 결과를 조건으로 그들은 매주 직접 취재한 기사를 한 편씩 써야 했다.
기사 발행 기준도 분명했다. 짜깁기나 정보 취합은 안 되고, 꼭 인터뷰나 현장 방문이 들어가야 했다. 대학생 입장에선 시간도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이 구조가 유지된 이유는 단 하나, 그게 ‘경력이 될 수도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 얼마나 허망한지. 기사는 포털 노출도 되지 않는 자체 매체에만 올라갔고, 조회수는 대부분 100을 넘지 못했다. 나조차도 이걸 내 포트폴리오에 넣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 구조를 돌리는 사람이 나였다. 기사를 관리하고, 퇴고하고, 마감 독촉 메일을 보내고, 수료 조건을 체크한 사람. 누구보다 그 시스템의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계속 사람을 굴리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업무였고 내 일이니까 했다. 그런데 점점 내가 이 구조의 일원이 아니라 운영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 일이 기사 쓰는 일에만 그쳤다면 그래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 바깥에 있었다. 회사에서 무언가 물량이 필요해지면 이미 수료한 서포터즈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공모전 참가자가 부족해도 불렀고 캠페인 홍보가 필요해도 불렀다. 공식적인 보상은 없었다. “혹시 시간 되면 도와줄 수 있을까요?” 같은 말투로 반복된 요청들. 나는 그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협조적인 상태’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떠나지 않고, 기사를 쓰고, 다시 호출에도 응해주기를.
나는 원래 그 서포터즈였다. 직접 겪어본 사람의 시선에서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보였다. 그런데 인턴으로 들어오고 나서 곧바로 이해하게 됐다. 이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선 아무것도 아닌 허울뿐인 서류들로 대학생을 묶어야 한다는 걸. 그 구조가 부당하다는 걸 알았지만 동시에 그 구조가 유지되어야 내 일이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바랐다. 그들이 버텨주기를. 마감일을 지켜주기를. 그만두지 않기를.
그게 제일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이제 서포터즈를 돕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버티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수료증과 경력증명서는 내가 직접 만들었다. 이름을 입력하고, 서명을 받고, 도장을 챙겼다. 나중에 다른 인턴십을 하면서야 알게 됐다. 그 문서들은 어디에도 내밀 수 없는 종이였고, 그 시간은 어디에도 기입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구조를 바꾸려 한 적도 있었다. 기사 수를 줄이자고 했고 활동 기간도 단축하자고 제안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가 일이 늘어나잖아”라는 한 문장 때문이었다. 그 ‘우리’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내 직함은 인턴이었고, 인턴의 말은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결국 나는 내 감각을 누른 채 시스템을 돌리는 사람으로 남았다. 책임을 졌다기보다는, 계속해서 다음 주의 기사를 정리했고, 마감일을 체크했고, 수료 인원을 집계했다. 구조는 유지됐고 나는 그 안에서 매끄럽게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게 옳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3)
처음엔 그랬다. 콘텐츠 마케터라고 하니 콘텐츠를 만들었다. 기획하고, 편집하고, 관리하고. 일이 많긴 해도 적어도 이름과 역할은 일치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도와줄 수 있어?’로 시작한 일들이 그냥 내 일이 되어갔다. 기획이었는데 인사팀 일이 되고, 편집이었는데 총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다 내 전공인 줄 알겠다.
가장 황당했던 건 외국인 대상 행사 준비였다. 외국어 가능자를 단기 알바로 뽑아야 한다며 알바몬 계정을 나한테 넘기더니, 지원서 검토부터 면접 일정 조율까지 전부 해달라고 했다. 업무 분장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걸 그때 처음 체감했다. 인사팀은 존재하긴 했다. 실장도 있었다. 다만 그 사람은 대표 친구였고 진짜 ‘일’은 하지 않았다. 어쩐지, 업무 공백이 생기면 자꾸 밑으로 내려오더라. 대체 왜 그런 일까지 하고 있나 싶었지만, 어느새 나는 지원자 엑셀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도가 있다면, 언론사 편집인을 내 이름으로 등록하자는 이야기는 그 선을 넘은 순간이었다. 보통 언론사 홈페이지 하단에는 편집인, 청소년보호책임자 같은 정보가 적히는데, 그 자리에 내 이름을 넣자고 했다. 발행인은 대표고, 나머지는 인턴인 나더러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그걸 듣는 순간 ‘좋은 건 위에서 가져가고, 법적 책임은 아래로 미는구나’ 싶었다. 이상하다고 말은 했고 결국 이름이 올라가진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 내 태도에 대해 말이 나왔다. “홈페이지 관리를 왜 이렇게 소홀히 하냐”는 식으로.
그건 정말 당황스러웠다. 나는 홈페이지 담당자가 아니었고, 인수인계도 없었고, 운영사 연락처조차 받은 적이 없었다. 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네가 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월급은 인턴 월급인데 무슨, 나보고 이 쥐꼬리로 뭘 하라고.
그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알게 됐다. 이 조직에선 누군가가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가장 말이 적은 사람한테 일이 내려온다는 걸. 정확히는, 말이 적고 직급이 낮은 사람. 그리고 대부분 그게 나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냐는 질문은 사실 “네가 하는 게 제일 편하다”는 말의 포장일 뿐이었다.
그래서 책임도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내가 관리하지 않은 시스템의 오류가 내 탓이 됐고, 내가 인수인계받지 않은 업무의 공백도 내 몫이 됐다. 내가 만든 문제가 아님을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그런 설명보다 필요한 건 ‘그럼 지금부터라도 해보겠다’는 자세였다. 알아서 해라,는 말을 돌려 말하면 결국 그렇다는 뜻이다.
그 시점부터 감정이 흔들렸다. 이건 단순히 일이 많아서 힘든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가 내 일인지 말할 수 없고, 책임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내려오고, 나는 계속 내가 아니었던 사람처럼 일해야 했다. 마케터였다가 인사팀이었다가 시스템 관리자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그냥 누군가의 방패막이 같았다. 직함은 그대로였지만, 역할은 사라지고 있었다.
결정적인 건 그날이었다. 또다시 시스템 문제에 대해 지적을 받았고, 그건 담당자가 따로 있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런 건 직접 알아가야지, 왜 못하겠다고만 하냐”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이 확 뒤집혔다. 인수인계도 없었고, 시스템 구조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거기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땐 참을 이유를 못 찾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말했다. 저 이번 달까지만 하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택이 빠른 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냥 버티던 거였다. 경력이 될 거라 믿어서, 그래도 이 경험은 어딘가에 쓰일 거라 생각해서. 그런데 점점 깨달았다. 이건 경력이 아니라 고장이었다. 더 이상 마케터로 일하는 게 아니라, 마케터인 척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러다 어느 날 확실히 선을 넘는 순간이 오면, 그런 척조차 못 하게 된다. 나는 그 지점이 여기라고 판단했다.
퇴사하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조금 명확해졌다. 아무리 잘해도 내 일이 아닌 건 내 일이 아니고, 아무리 조용히 해도 책임은 무작위로 내려온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구조에서 계속 버티는 사람이 결국 책임까지 떠안는다는 사실. 나는 그걸 거절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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