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2월10일 수요일
“규동님 잠시 1on1 가능하신가요?”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오후, 컴퓨터 화면 상단에 회사 대표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조금 갑작스럽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이곳으로 이직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팀원들에게서 1년을 채우면 연봉 협상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도 들은 터라,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짐작했다.
근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근무일이 정확히 1년이 되려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는 것
‘원래 이렇게 미리 부르시는 거였나…?’
나는 가벼운 의문을 품은 채 1:1 회의실로 향했다.
그 자리가 어떤 대화를 위한 자리인지 전혀 모른 채로 말이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내 앞에는 40대 초반의 젊은 대표가 앉아 있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 그는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켰는데
나는 그 손짓이 실시간으로 대화를 기록하는 AI 툴을 실행하는 동작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시는 거 같다.

“규동님, 이제 곧 1년을 채우시는데요.
그동안 어떤 실적을 쌓으셨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그동안 맡아왔던 업무와 성과를 차분히 설명했다.
이 회사는 커머스 업계에서도 빠른 성장세를 타고 있는 스타트업으로 나는 시니어 연차의 콘텐츠 마케터로 대표에게 비교적 높은 기대치를 받으며 입사했다. 솔직히 압박감을 느끼는 순간도 많았지만, 그 기대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왔다.
하지만 말을 이어갈수록 성과에 대한 확신은 점점 흐려져갔다. 채널별 방향성도 빠르게 바뀌었고, 그동안 제작한 콘텐츠만으로 누구나 납득할 만한 성과로 설명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열심히 일해주신 건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 야근도 잦았고, 집에서도, 주말에도 일하시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 점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뒤,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제가 처음 규동님을 모셨을 때 기대했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사이에는 조금은 간극이 있다고 봅니다. 더 주도적으로 전략을 제시해주길 바랐는데, 그러지 않았던 거 같아요.”
바로 이어진 질문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직설적이었다.
“지금 SEO 콘텐츠를 구조화하고, 인턴들과 함께 아티클을 작성하고 계시죠? 그럼 한 가지 여쭤볼게요. 현재 이 콘텐츠 제작 업무에서, 규동님이 인턴들과 다른 점이 뭔가요?”
질문이 끝나자 순간 회의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 콘텐츠 제작은 철저한 ‘속도전’이었다.
내가 이전에 해왔던 방식은 밀도 높은 완성도를 중시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이곳에서는 빠르게 생산하고, 빠르게 쌓는 것이 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 기준 안에서 돌아보면, 대표의 눈에는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저연차들의 업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그 순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마 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자, 원래 이 자리는 규동님의 연봉을 협상하는 자리였습니다. 제가 제안드리는 연봉은 ‘동결’이에요. 그리고 지금부터 세 가지를 제안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회사를 다니시면서 이직 준비하세요. 두 번째, 26년에도 계속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저를 납득시킬 수 있는 전략과 방향성을 제시해 주세요. 세 번째는 규동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제안주시면, 저희는 어떤 내용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 세 번째는 권고사직을 말씀하고 싶은 걸까요?”
“그것도 포함됩니다. 규동님이 이 회사에서 열심히 해주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저희도 최대한의 선택지를 열어두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제가 요즘 드는 생각은요… 우리 회사에 규동님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희는 26년에는 더 빠른 성장을 위해 지금보다 훨씬 서둘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대화 내내 불편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입사 전에 안내받았던 JD, 과제 전형에서 기대했던 역할, 그리고 실제로 맡게 된 업무 사이의 간극, 빠르게 바뀌는 방향성들….
이전에도 스타트업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 큰 불만 없이 열심히 달려왔다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이 상황이 온전히 내 개인의 부족으로만 정리되는 느낌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회의는 분명 나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표님.
저도 이곳에 근무하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고, 말씀하신 ‘타이밍’이라는 표현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안주신 내용은 차주 중으로 답변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회의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누군가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평소처럼 웃으며 지나간다.
방금 전 대화가 없었던 것처럼, 회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왔지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연봉 협상 자리에서 이직 준비를 권유 받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다.
이제 어쩌나…? 대표가 제안했던 세 가지 선택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1번을 선택하면 아마도 몇 달의 시간이 주어지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도 야근과 주말 근무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부터 면접 준비까지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이직에 실패하고 제안 기간을 넘기게 되면, 나는 말 그대로 쌩퇴사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2번은 더 막막했다. 현재 맡고 있는 업무에서 이제 막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는 흐름인데, 짧은 시간 안에 ‘납득 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압박감, 그 모든 과정이 숫자와 보고로 증명되어야 하는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아아… 전의를 상실한 기분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에 입사하고 마음 한켠에 두고 있던 ‘퇴사’를 정말 실현하게 될 날이 온 건 아닐까 싶다.
시니어 연차가 된다는 건
이제 주니어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왜 이 연봉을 받아야 하는지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주 선명하게 체감했다.
규동님 글 더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ldg28ldg
25년 12월10일 수요일
“규동님 잠시 1on1 가능하신가요?”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오후, 컴퓨터 화면 상단에 회사 대표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조금 갑작스럽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이곳으로 이직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팀원들에게서 1년을 채우면 연봉 협상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도 들은 터라,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짐작했다.
근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근무일이 정확히 1년이 되려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는 것
‘원래 이렇게 미리 부르시는 거였나…?’
나는 가벼운 의문을 품은 채 1:1 회의실로 향했다.
그 자리가 어떤 대화를 위한 자리인지 전혀 모른 채로 말이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내 앞에는 40대 초반의 젊은 대표가 앉아 있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 그는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켰는데
나는 그 손짓이 실시간으로 대화를 기록하는 AI 툴을 실행하는 동작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시는 거 같다.

“규동님, 이제 곧 1년을 채우시는데요.
그동안 어떤 실적을 쌓으셨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그동안 맡아왔던 업무와 성과를 차분히 설명했다.
이 회사는 커머스 업계에서도 빠른 성장세를 타고 있는 스타트업으로 나는 시니어 연차의 콘텐츠 마케터로 대표에게 비교적 높은 기대치를 받으며 입사했다. 솔직히 압박감을 느끼는 순간도 많았지만, 그 기대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왔다.
하지만 말을 이어갈수록 성과에 대한 확신은 점점 흐려져갔다. 채널별 방향성도 빠르게 바뀌었고, 그동안 제작한 콘텐츠만으로 누구나 납득할 만한 성과로 설명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열심히 일해주신 건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 야근도 잦았고, 집에서도, 주말에도 일하시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 점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뒤,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제가 처음 규동님을 모셨을 때 기대했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사이에는 조금은 간극이 있다고 봅니다. 더 주도적으로 전략을 제시해주길 바랐는데, 그러지 않았던 거 같아요.”
바로 이어진 질문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직설적이었다.
“지금 SEO 콘텐츠를 구조화하고, 인턴들과 함께 아티클을 작성하고 계시죠? 그럼 한 가지 여쭤볼게요. 현재 이 콘텐츠 제작 업무에서, 규동님이 인턴들과 다른 점이 뭔가요?”
질문이 끝나자 순간 회의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 콘텐츠 제작은 철저한 ‘속도전’이었다.
내가 이전에 해왔던 방식은 밀도 높은 완성도를 중시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이곳에서는 빠르게 생산하고, 빠르게 쌓는 것이 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 기준 안에서 돌아보면, 대표의 눈에는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저연차들의 업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그 순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마 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자, 원래 이 자리는 규동님의 연봉을 협상하는 자리였습니다. 제가 제안드리는 연봉은 ‘동결’이에요. 그리고 지금부터 세 가지를 제안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회사를 다니시면서 이직 준비하세요. 두 번째, 26년에도 계속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저를 납득시킬 수 있는 전략과 방향성을 제시해 주세요. 세 번째는 규동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제안주시면, 저희는 어떤 내용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 세 번째는 권고사직을 말씀하고 싶은 걸까요?”
“그것도 포함됩니다. 규동님이 이 회사에서 열심히 해주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저희도 최대한의 선택지를 열어두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제가 요즘 드는 생각은요… 우리 회사에 규동님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희는 26년에는 더 빠른 성장을 위해 지금보다 훨씬 서둘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대화 내내 불편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입사 전에 안내받았던 JD, 과제 전형에서 기대했던 역할, 그리고 실제로 맡게 된 업무 사이의 간극, 빠르게 바뀌는 방향성들….
이전에도 스타트업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 큰 불만 없이 열심히 달려왔다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이 상황이 온전히 내 개인의 부족으로만 정리되는 느낌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회의는 분명 나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표님.
저도 이곳에 근무하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고, 말씀하신 ‘타이밍’이라는 표현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안주신 내용은 차주 중으로 답변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회의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누군가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평소처럼 웃으며 지나간다.
방금 전 대화가 없었던 것처럼, 회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왔지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연봉 협상 자리에서 이직 준비를 권유 받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다.
이제 어쩌나…? 대표가 제안했던 세 가지 선택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1번을 선택하면 아마도 몇 달의 시간이 주어지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도 야근과 주말 근무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부터 면접 준비까지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이직에 실패하고 제안 기간을 넘기게 되면, 나는 말 그대로 쌩퇴사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2번은 더 막막했다. 현재 맡고 있는 업무에서 이제 막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는 흐름인데, 짧은 시간 안에 ‘납득 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압박감, 그 모든 과정이 숫자와 보고로 증명되어야 하는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아아… 전의를 상실한 기분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에 입사하고 마음 한켠에 두고 있던 ‘퇴사’를 정말 실현하게 될 날이 온 건 아닐까 싶다.
시니어 연차가 된다는 건
이제 주니어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왜 이 연봉을 받아야 하는지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주 선명하게 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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